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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왜 홀로코스트로 600만 유대인을 죽였을까?

유대인의 역사와 사회 이야기 #3

'홀로코스트(Holocaust)'란 독일 나치 정권의 수장 히틀러가 중심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12년(1933~1945) 동안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한다. 홀로코스트는 나치당(NSDAP,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의 극우 민족주의가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모든 국가 권력을 총동원하여 저지른 인류 최대의 치욕스러운 범죄행위였다. 히틀러는 우생학을 바탕으로 인종주의 이론을 내세워 우수한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면 열등한 유대인과 피가 섞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논리를 교묘하게 조작해서 반유대주의가 팽배하던 대중의 정서를 왜곡시킨 후에 유대인과 집시, 러시아인 등 약 천만 명 이상을 죽였다. 그 중에 600만 명이 유대인들이었다.      

히틀러는 세계사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인종들 간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국제적 금융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이끌고 있는 유대인들이 게르만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며 유럽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고 봤다. 히틀러는 1933년 1월에 나치당의 대표로 독일의 총리가 되자마자 유대인 박해를 시작했다.      


1단계는 유대인을 폭행하거나 유대 상점 불매 운동, 유대 상점 약탈 등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2단계는 1935년 베르사이유 조약의 파기와 재무장을 선언한 후 제정한 뉘른베르크법에 따라 독일인과 유대인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3단계는 격리와 추방 정책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대규모로 체포해서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것이었다. 4단계는 1939년 9월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 유대인들을 대규모로 게토에 수용시킨 것이었다. 5단계는 1941년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후에 강제수용소의 목적을 구금에서 살인으로 바꾼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민족의 단합을 위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과 우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의 유대인을 소탕해야 한다며 '인종 청소'를 감행했다. 히틀러는 광적인 잔혹성으로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해 유럽에서 천 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참하게 죽어갔을까? 첫째 나치의 교묘한 거짓말과 정교한 속임수에 속았기 때문이었다. 둘째, 게토의 유대인들이 수용소의 실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셋째, 가톨릭 교회와 교황을 포함한 유럽 사회 전체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침묵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의 유대인 랍비 바이스만델이 로마 교황청에 무고한 어린 유대인들만이라도 살려달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 교황청의 답장은 소름 끼칠 정도로 매몰찼다. "이 세상에 무고한 유대인 어린이의 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유대인의 피는 죄악이다. 당신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 것이다. 당신들은 죽어 마땅하다."   

    

<유대인의 역사>의 저자 폴 존슨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2,000년에 걸친 기독교도와 성직자들, 평민들, 세속인들, 이방인들의 반유대주의적 증오가 히틀러에 의해 하나의 거대한 괴물로 합쳐져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 홀로코스트는 '번제(燔祭, 신을 위해 짐승을 불태워 제물로 바치는 것)'라는 뜻의 그리스어 'holokauston(홀로카우스톤)'에서 유래된 용어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감으로 대재앙(절멸)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Shoah(쇼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불과 70년 전에 어떻게 이런 엄청난 반인류적인 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을까? 개인과 사회, 역사 등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원인을 살펴보자.   

1. 개인적 측면     


히틀러의 어릴 때 꿈은 화가였는데, 미술학교의 유대인 심사위원들이 자신을 불합격 시켜서 꿈이 좌절되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산과 연금으로 생활하던 히틀러는 독신자 합숙소에서 생활하며 하층 시민의 열악한 생활을 알게 되면서 자본의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고, 부르주아와 유대인을 혐오하는 독일민족주의자, 반유대주의자로 변해갔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노예 무역을 주도하고 있던 것에 혐오감을 느꼈다.      


히틀러는 열등한 유대인이 우수한 독일인의 혈통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갖고 있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운영하던 매춘 사업과 당시에는 치료제가 없었던 매독을 연결시켜 유대인들이 성적 접촉에 의한 성병으로 게르만 민족의 혈통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다. 이런 히틀러의 성적, 의학적 견해에 따른 반유대주의는 그의 신봉자들을 광적인 사상가들로 변하게 만들었고, 잔혹하면서도 비합리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게 만들었다. 중세의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을 악마나 불결한 암퇘지로 생각했다면 나치의 광기어린 당원들은 유대인을 세균이나 해충처럼 여겼다.      


2. 사회적 측면     


200년 이상 30여 개의 작은 공국들로 갈라져 있던 독일은 19세기 후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해양 강국인 영국에 맞서려면 경제력을 바탕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가 제조업과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동안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핍박받던 유대인들이 독일로 대거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제조업과 금융산업, 해상무역업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며 독일의 발전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로부터 30년 사이에 함부르크는 뉴욕에 이어 세계 2위의 항구로 급성장했고, 독일은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도약했다. 히틀러가 활동하던 20세기 초에 독일에서는 유대인들이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상업과 무역업, 금융업, 유통업, 조선업, 해운업 등에 종사하며 독일 경제를 주름 잡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연예 산업과 유흥 산업에도 진출해 사회적인 풍기문란의 주범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틈만 나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의 붉은 혁명을 주도한 레닌과 트로츠키는 유대인이었고, 무력 폭동으로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 50명 가운데 44명이 유대인이었으며, 혁명 정부의 핵심 관료 545명 중에 80%가 넘는 447명이 유대인이었다. 히틀러는 러시아에서 피난 온 독일인들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의 배후에 유대인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독일의 공산화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의 뿌리를 뽑기로 작정했다. 훗날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한 것도 유대인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다.      


1918년 말에 독일 국민들은 엄청난 시련에 직면해 있었다. 황제의 퇴위와 새로운 정권의 등장,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의 위협,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한 상실감, 10만 명 이상 사망한 독감의 유행 등이 악재로 작용했다. 특히 치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인한 320달러에 달하는 과도한 전쟁 배상금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에 참여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터무니 없이 많은 전쟁배당금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독일이 배상금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조만간 복수에 나설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케인즈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 뒤인 1929년 10월에 야기된 세계 대공황으로 독일은 초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 서민층의 몰락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며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독일인들은 상대적으로 고통을 덜 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독일의 인구 중 3퍼센트에 불과한 유대인은 독일 경제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은 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지며 비참해지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나라 경제를 지배하며 계속 부를 늘려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독일인들의 분노는 하늘로 치솟았다. 독일인들은 초인플레이션을 일으킨 주범이 유대인 금융자본가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돈으로 게르만 처녀를 사는 돼지, 고리대금업자, 부르주아 자본가 등으로 묘사하며 반유대주의를 주창했던 독재자 히틀러를 독일 경제를 위기에서 구출할 적임자로 임명했다.         


1933년부터 1938년 사이에 행해진 박탈과 몰수, 대학살로 히틀러는 유대인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당시 독일에는 언어 폭력과 신체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말들이 쏟아졌고, 거리에서는 사람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일이 많았다. 언론과 거리의 폭력에 쇠뇌당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파와 한 통속으로 생각했으며, 독일인의 순결을 더럽힐 가능성이 큰 위험요소로 바라봤다. 

3. 역사적 측면     


유럽에서의 반유대주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되었다. 반유대주의의 가장 큰 원인은 유대인들만의 독특한 종교적 관습과 문화 때문이었다. 하나님만 믿는 유일신 사상,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선민 사상, 하나님과 약속한 징표로 삼는 할례 관습,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주일에 하루 휴식하는 안식일 관습, 하나님과의 성스러운 만남을 위한 식사법과 정결법, 다른 민족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반인도주의적 결혼 관습, 그들만의 공간인 게토에 살면서 자신들만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폐쇄적인 생활 태도 등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중세에 반유대주의가 강했던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교리 차이 때문이었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예언자 중의 한 명으로 생각한다. 유대교인들은 아직 구세주가 오지 않았고, 자신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 하지만 유대교는 예수를 하나님과는 구분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유대교인들 중에는 예수가 유대교를 훼손하고 이방인들을 신자로 받아들인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의 신으로 모시는 예수를 유대교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의 증오심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중세에 유대인들이 상업과 대부업을 석권하면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 정서가 확산되었다. 11세기 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런데 십자군들은 이교도나 이단은 토벌해야 한다는 집단의식에 휩싸여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되었고, 프랑스 루앙과 독일의 라인란트 등에서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1095년부터 1270년까지 약 200년 동안 8차에 걸쳐 계속된 십자군 운동으로 유대인들은 공동체 생활이 파탄났고, 민족적 혐오감이 커졌다.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600년 동안 유럽의 유대인들은 조롱과 냉대, 혐오의 대상이었고, 가난과 공포, 절망의 대명사로 불리며 겨우 생존을 이어나갔다. 유럽의 통치자들은 세금을 내는 대가로 황제의 보호를 받는 유대인을 경제적인 이용물로 밖에 여기지 않았고,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기를 되풀이 했다.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중세 사회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유대인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고, 개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박해를 가했다. 특히 구약 성경을 신앙의 뿌리로 공유한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은 '고집불통'의 이미지가 강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반유대주의 정서를 키웠고, 종교적 살인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16세기까지 구약 성경은 대중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아서 사람들은 성경을 전혀 몰라서 어떤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근거 없는 소문으로 인한 오해가 많았다. 뛰어난 경제관념과 어쩔 수 없이 대부업과 상업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때문에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경제를 장악했던 것도 시기와 질시의 원인이 되었다. 탁월한 언어능력과 풍부한 지식으로 어디에서든 리더나 전문직으로 자리 잡은 것도 문제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나치의 민족말살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인식하고 전범들을 철저히 색출해 법정에 세웠다. 독일은 나치를 전승국이 심판하기보다 독일 법원에서 심판해야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은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폴란드, 프랑스와 함께 공동 교과서를 집필하고, 철저한 역사 교육으로 나치의 만행을 참회하고 있다. 독일의 지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며 과거사 청산을 계속하고 있다.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의 바르샤바 게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의 범죄에 대해 진심어린 사죄를 했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쇼아)의 역사를 절대 잊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독립기념일 전날을 쇼아의 날로 정해서 독립을 기뻐하기 전에 민족의 고난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예루살렘의 쇼아 추모관에 있는 글귀가 유대인들의 역사 의식을 대변해 주고 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참고> 진북 하브루타 연구소 추천 <하브루타를 위한 홀로코스트(나치 히틀러) 관련 영화 리스트>

-> http://cafe.naver.com/zinbook/5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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