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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왜 주로 비난 받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했을까?

유대인의 역사와 사회 이야기 #4

중세에 대금업은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가진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돈이 필요할 때 대금업자를 천사처럼 반겼다. 평민들은 흉년에 곡물을 사기 위해, 귀족들은 화려한 파티를 열기 위해, 성직자들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기 위해 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다. 하지만 돈을 갚을 때는 대금업자를 악마처럼 무서워했다. 중세에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금업’이 왜 가장 비난을 받는 업종이었을까? 유대인들은 왜 고리대금업에 많이 종사했을까?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반유대적인 법령들 때문에 유대인들이 토지와 노예를 소유할 수 없었다. 중세는 토지를 중심으로 자급자족하던 봉건사회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노동 집약적인 농업에 종사하기 어려웠다. 유대인들이 제도권 안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외곽을 떠돌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런 법령들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상업과 대금업이 유일한 틈새 시장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에 비해 고리대금업에 많이 종사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자’에 대한 상이한 관점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자가 시간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므로 시간의 주인인 하나님께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179년 로마 교황청은 기독교인들이 공식적으로 대금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반면 유대교는 동족이 아닌 이방인과의 거래에서 이자를 받는 것을 허용했다.      


중세 기독교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죄악으로 여겼고, 영혼을 지옥에 파는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십자군 운동과 종교개혁을 통해 기독교 중산층들이 대금업에 진출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독점하던 대금업에 뛰어든 기독교 중산층들은 국제적인 무역과 금융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유대인들과 공정한 경쟁을 해서는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부에 유대인들을 추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서유럽에서 활동하던 유대인들이 100년 정도 발전이 뒤쳐진 동유럽으로 대거 이동하자 서유럽의 금리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돈놀이의 재미를 맛본 기독교 중산층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이자율을 적용해 자신들의 수익률을 극대화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대금업이 제1금융권(은행)이나 제2금융권(저축은행, 신용협동조합, 보험회사)같은 공식적인 '금융업'의 이미지였다면, 기독교 중산층들의 대금업은 제3금융권(대부업체, 사금융)처럼 비공식적인 '사채업'의 이미지였다.        

유대인들에게는 국제 협약인 탈무드와 법률적 권위자인 랍비가 있어서 대금업을 할 때 적절한 이율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탈무드에는 '과도한 이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기독교 중산층들에게는 탐욕을 제어해 줄 아무런 장치가 없었다. 국민들이 높은 이자율로 고통을 받자 서유럽 국가의 의회는 유대인 대금업자를 다시 자국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왕에게 청원했지만 별로 소득이 없었다. 왜냐하면 위기감을 느낀 기독교 중산층들이 왕에게 뇌물을 바치며 적극적인 로비에 나섰고, 동유럽에서 자리를 잡은 유대인들도 다시 서유럽으로 돌아갈 마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출 이자율이 갈수록 치솟고, 대출 문턱도 점점 더 높아지자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결국 왕은 유대인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높은 이자때문에 고통받는 '선한' 기독교인과 높은 이자로 괴롭히는 '악한' 유대인의 이미지는 기독교 중산층 고리대금업자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신화였다.            


근대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에너지의 원천을 두고 막스 베버는 '개신교의 세속적 금욕주의'라고 봤고, 베르너 좀바르트는 '유대인의 상업주의'라고 봤다. 십자군 운동과 르네상스 이후 탄생한 기독교 중산층들은 봉건제도의 규제에서 벗어나 더 많은 노동력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근대 자유시장을 원했다. 과거에는 가톨릭교회의 예배당이 '선(善)'이었다면 이제는 상품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 '최선(最善)'이었다. 봉건 영주들과 왕, 교황 등은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지키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기독교 중산층은 무역의 확대로 인해 축적된 부(富)를 바탕으로 과거 기득권 세력에 도전장을 던졌다. 출신 성분에 따라 형성된 중세 귀족층과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힘을 얻게 된 근대 기독교 중산층의 진검 승부가 시작된 것이었다.     

 

기독교 중산층은 가톨릭교에 반대하는 개신교 혁명을 이끌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종교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는 가톨릭교에서 금지되던 것들을 허용하는 새로운 강령들을 발표했고, 특히 대금업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기독교 중산층은 개신교에서 자본주의를 합법화 시켜줄 시스템과 모델을 찾았다. 기독교 중산층은 개신교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자본주의를 '선(善)'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렇게 개신교와 자본주의는 함께 손을 잡고 근대의 문을 열었다.         


유대인들이 근대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비결은 그들이 만든 '금융 경제'때문이었다. 금융 경제란 추상적인 개념의 경제를 뜻하며, 대표적인 예가 은행 대출과 이자 수익 시스템이다. 실물 경제란 실체적인 개념의 경제를 의미하며, 기업의 생산과 개인의 노동, 시장의 거래 등 실제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 활동을 말한다. 중세 봉건사회는 성직자와 귀족, 농노의 세 계층으로 구성되었고, 유대인은 체제 중심에서 벗어나 상인 계층을 형성했다. 유대인들은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기때문에 생존을 위해 실물 경제와는 다른 금융 경제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이 금융 경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배경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첫째,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봉건주의 사회체제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 중국을 포괄하는 국제적인 상업망을 갖고 있었다. 둘째, 유대인들이 국제 사업망에 '신용과 양도, 담보' 제도의 개념을 도입했다. 셋째, 국제적 자본주의가 탄생하려면 국제협약을 준수하고, 자유무역을 보호하며, 국가 간의 화폐교환을 허용하고, 해외 투자를 허용하며, 재산의 박탈을 방지하는 등의 요건들이 필요한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국제 사업망 안에서 이미 이런 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묵시적인 국제법 규약의 역할을 하는 탈무드가 있었고, 상업 활동과 관련된 모든 일을 재판관처럼 중재했던 랍비들이 있었다. 이런 든든한 후원군이 있었기때문에 유대인들은 각 나라에서 상업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근대 자본주의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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