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5: AI와 함께한 고3의 봄
AI시대 2030 대한민국 - 기본의 나라
에피소드 5: AI와 함께한 고3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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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서울 관악구, 태흥고등학교 3학년 5반. 창가 쪽 네 번째 줄에 앉은 손우진은, 방금 열린 학교 내부 시스템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학생명: 손우진
AI 적성 기반 진로 매칭 보고서 ver.3.1
최적화 진로 순위:
1. 공공AI 인프라 분석관 92.3%
2. 기후예측 엔지니어 89.4%
3. 인간감정 보조 설계사 86.7%
기반 요인: 반응속도, 분석력, 정서 안정도, 스트레스 회피 성향 등
그는 보고서를 닫지 못한 채, 빈 페이지를 오래 들여다봤다. 그 어디에도 ‘소설가’, ‘이야기 작가’, ‘문장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이 교실 어딘가에도 묻힐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야, 나도 결과 떴다!”
반 친구 태경이 외쳤다.
“AI 음향 프로그래머! 감정음성 설계 분야래! 진짜 멋있지 않냐?”
반 아이들은 웅성였고, 교실 뒤쪽 전광패널에는 ‘이력서 자동공유 동의율: 86%’가 떠 있었다. 자신의 적성 결과를 공유하면 학교 차원에서 그에 맞는 실습 기회를 추천해준다. 입시는 사라졌고, 미래는 확률로 예측되고 있었다. 모두가 그 시스템을 ‘공정’이라 불렀다. 누구도 경쟁하지 않고, 누구도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자기에게 맞는 길을 ‘선택받을 뿐’이었다.
우진은 점심시간에도 말이 없었다. 그는 책상 서랍 속에서 조심스럽게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흑백으로 출력된, 짧은 시였다. 그가 밤마다 몰래 쓰는 이야기. 정확하지 않고, 대체로 길이가 불균형했고, 가끔은 너무 감정적이었다. 그 시의 마지막 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미래가 나를 먼저 고르기 전에, 나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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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담임선생님의 호출로 AI 진로상담실에 들렀다. 담임은 말했다.
“우진아, 너 보고서 확인했지?”
“네.”
“공공AI 분석관이면 꽤 안정적인 진로야. 좋은 지원 기회도 있고.”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뒤, AI 진로코치 마루가 대신 말을 이었다.
“손우진 학생, 당신의 창의성 지수는 76.4%, 하지만 언어 감정예측 일관성이 낮아 예술 직군에서는 불안정 요인으로 분석됩니다.”
우진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요. 그 불안정이 제가 쓰고 싶은 이유예요.”
마루는 멈췄고, 담임은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럼... 그 말을 계속 갖고 있어 봐. 언젠간 꼭 꺼낼 기회가 올 거야.”
방과 후 옥상. 우진은 구겨진 원고 뭉치를 펴고 있었다. 그 옆엔 문서영, 같은 반 친구이자 학교 문예부에서 유일하게 시를 쓰는 아이.
“나, AI가 제시한 진로 다 지웠어.”
서영은 말했다.
“왜?”
“모르겠어. 나라는 사람이 왜 기계의 제안으로 결정돼야 하는지.”
“근데... 그게 틀리진 않았잖아.”
“맞아. 그게 더 무서워. 틀리지 않았는데, 내가 없는 기분.”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어젯밤 쓴 시 한 편을 그녀에게 건넸다. 서영은 조용히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시는... 누가 읽는다고 쓰인 건 아니네.”
“응. 내가 나한테 쓰는 거야.”
집에 돌아온 우진은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는 보고서를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분석관이면 참 좋지. 국가직도 될 수 있고. 아빠도 예전에 통계청 쪽 가고 싶어 했잖아.”
“응...”
“그래도 네가 좋다면 뭐든 응원할게.”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느꼈다. 그 진심조차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길 바라는 조심스러움’이었다. 그는 반찬을 집으며 조용히 말했다.
“혹시 내가... 아무 쓸모 없는 글만 쓰고 싶다고 해도, 응원해줄 수 있어?”
어머니는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응. 그 글이 네 마음을 살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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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적성 이력서를 바탕으로 한 진로지망서를 제출하는 날. 전교생 중 92%가 AI 추천 진로와 동일하게 작성했다. 우진은 한참을 망설였고, 마지막 줄에 조용히 적었다.
“진로명: 자유 창작자, 독립 글쓰기”
“설명: 기계가 모르는 언어의 틈을 찾아 쓰는 사람.”
제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눈은 잠시나마 또렷했다.
그해 봄, 우진은 자비를 들여 만든 디지털 시집을 학교 커뮤니티에 올렸다. 제목은 ‘정확하지 않아서 살아 있는 말들’ 조회수는 238.댓글은 7. 그중 하나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도 이런 말 써보고 싶었어요. 근데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 글을 보고 용기가 생겼어요.”*
그 글을 읽는 순간, 우진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작게 ‘움직였다’고 느꼈다. 그건 확률도, 제안도, 안전도 아닌, 사람의 흔적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진유하 PD의 카메라에 담겼다. ‘기본사회 속, 예측 불가능한 사람들’이라는 시리즈 중 하나로. 우진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골목 어귀 벽에 작은 종이 쪽지를 붙이는 모습이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내가 쓰는 이야기를 먼저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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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예고 : 6화 공공의사 ‘도움이’
시골의 작은 병원에서 ‘AI 공공의사 도움이’는 하루 수백 건의 진료를 빠르고 정확히 처리한다. 그러나 어느 날, ‘도움이’가 놓친 한 환자의 울음 속에서 진짜 의사의 존재 이유가 다시 물음표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