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철새처럼 떠돌고 있었다. 목적지가 없는 비행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떠나야 했으므로 그녀는 선을 긋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가장 편한 방향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마주했을 때도 그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정을 주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그럼에도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아이가 있었다. 혜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아도 그 아이는 조금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멀뚱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수진은 무감각한 얼굴의 아이에게 조금씩 시선이 갔다.
지저분한 아이는 공격받아.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신호니까
공격해도 상관없다고 써 붙이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야.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돌봐야 해.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해.
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수진은 혜나에게 말했다. 스스로를 돌보는 것. 수진의 한 마디에는 익숙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혜나의 모습에서 애써 지우고 싶었던 자신을 발견했다. 어른에게 사랑받기 위해 애를 쓰며 자신의 상처를 견뎌내는 아이. 아무리 무감각해지려 노력해도 수진은 그런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동료 교사 예은 역시 수진처럼 혜나의 상처를 발견했다. 제도권 안에서 그녀는 혜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학교도, 경찰도 해나의 문제에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며 몸을 사렸다. 그것은 그저 '남의 가족'의 문제이니까.
그들이 책임을 돌리는 사이 혜나는 설악에게 학대당했다. 혜나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던 엄마 자영조차도 점차 그 폭력을 외면하기 바빴다. 자신이 설악에게 버려지지 않기 위해.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도록. 그 결과.
혜나는 쓰레기봉투에 버려졌다.
시스템은 혜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경찰이라는 국가 조직부터 일상생활을 하던 학교, 가장 작은 단위의 가족까지 아이를 둘러싼 조직 하나하나가 외면을 선택했다. 작은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사랑받기 위해서 참아내는 일이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슬퍼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모두 구겨 넣었다. 아이는 지켜지기보다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고 최후의 순간에 모든 걸 포기했다.
수진의 머릿속에서 점차 혜나에 대한 걱정이 불어났다. 혜나의 집에서 발견했던 수많은 정황들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다급히 혜나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끝내 수진은 죽어가는 혜나와 마주했다. 억누르고 외면했던 감정은 순간 불이 붙었다.
어린 시절의 수진. 애써 눌렀던 기억이 수진 앞에 있었다. 아무도 지켜주지 못해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어린아이. 수진은 과거의 자신도, 현재의 혜나도 지나칠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살려달라는 한 마디조차 포기한, 체념한 어린아이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혜나 : 왜 아이는 엄마가 없이 살 수가 없어요?
수진 : 살 수 있어. 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거야.
혜나 : 엄마가 나를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수진 : 이젠 네가 버리는 거야, 엄마를. 할 수 있겠니?
수진은 자영의 눈을 속여 혜나를 자살한 것처럼 위장했다. 그렇게 혜나는 선택했다.
‘혜나’ 대신 ‘윤복’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수진은 그렇게 ‘윤복이의 엄마’가 된다.
수진은 윤복과 함께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는 새로운 관계가 쌓여갔다. 자영을 보호하기 위해 연기를 펼치던 '혜나'는 사라졌다. 아이는 감정을 드러내고 행복을 느끼는 '윤복'이가 되어갔다. 자영을 다시 만나게 된 순간에도 윤복은 '혜나였던 과거'를 버렸다. 이제 윤복에게 엄마는 수진이였으므로.
자영은 혜나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이유를 수진이 가진 돈에서 찾았다. 물질적인 것이 아이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다고 여겼다. 더 가진 자가 자신의 하나뿐인 아이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끝끝내 자영은 아이의 소중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설악의 학대가 이어졌을 때도, 엄마가 시키는 거짓말을 묵묵히 할 때도, 혜나가 바란 건 단 하나였다. 사랑.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린 엄마는 아이에게 버려졌다. 그녀는 아이의 성장을 누구보다 망쳐버린 최악의 어른이었으니까.
자영과 수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영 역시 처음부터 혜나를 학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혜나를 키우기 위해 홀로 부단히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 아이에 대한 책임과 타인의 시선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고단함이 더해질수록 자영은 의지할 존재가 필요했다. 각박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그런 쉼터. 설악은 그런 자영을 이용했다. 빈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쉽게 넘어올 사람이었으니까. 설악의 진정한 목표는 자신의 폭력을 견뎌낼 혜나였지만 말이다.
설악의 손길이 혜나에게 향할수록 자영은 갈등했을 것이다. 이대로 막을 것인지. 외면한 채 설악과의 관계를 이어갈 것인지. 그녀의 선택은 혜나가 아닌 설악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는 삶을 원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외면. 딱 한 번의 외면이 점점 쌓여갔다. 폭력이라는 단어에 흙을 덮었다. 그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아이에게 닥친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결국 혜나를 죽이려는 설악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 오빠. 혜나는 죽었어. 집에 돌아올 수 없어.
오빠가 알아서 해줘. 어떻게 했는지 나한테 얘기하지 말고.
나 알고 싶지 않아.
수진은 어떨까. 혜나를 납치한 설악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수진에게 말했다. 애를 키우는 고통을 아무것도 모르는 수진이 어떻게 엄마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설악 : 난 너무 궁금해. 해나가 네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얼마나 힘들어할까.
엄마가 되는 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 내가 알게 해 줄게.
수진 : 우리 엄마는 날 위해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셨어.
또 다른 엄마는 30년 동안 내 편이 되어 나를 지켜주셨고.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거야.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아니까.
수진에게는 두 엄마가 있었다. 어린 수진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엄마 홍희. 30년 동안 수진을 아끼며 길러준 영신. 두 사람이 있었던 만큼 수진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가는 일의 무게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영신은 수진에게 무한한 지지와 사랑을 가르쳐주었다.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지만 그녀는 수진을 자신의 딸로 맞이했다. 혼자였던 그녀의 세계에 ‘수진’이라는 아이가 들어섰다. 아이가 들어선 세계는 그녀에게 다른 현실을 가져다주었다. 세상은 아이로 인해 새롭게 물들었고 상처받은 아이였던 수진 역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자기 배로 아이를 낳아야만 엄마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건 다른 작은 존재한테 자기를 다 내어줄 때에요.
해나 엄마는 낳기만 낳았지 엄마가 아니고요.
우리 수진이가 진짜 엄마예요.
수진은 영신이 있었기에 그 순간 혜나를 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수진은 이미 아이를 낳지 않아도 누구보다 ‘엄마’ 일 수 있는 사람을 보고 자랐으니까. 그것이 수진의 용기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보호해 줄 존재가 필요하다. 환경과 관계에 영향을 받으며 나날이 성장하는 아이에게 부모의 영향력은 하나의 세계 그 자체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세계 속에서 아이는 어른의 불안을 흡수한다. 불안하고 미성숙한 어른에게서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애를 쓴다. 불안한 환경과 고갈된 관계를 경험한 아이의 성장은 그렇게 멈춰버린다. 수진을 만나기 전까지 혜나의 삶은 자영의 관심과 사랑을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 버티는 하루였다. 세계가 당장 금이 가고 있어도 아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과 연결된 고리를 지키는 것이 아이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수진을 만나고 혜나에서 벗어난 윤복은 그늘 아래 있는 법을 배웠다. 손톱을 깎아주고 말없이 꼭 안아주는 단 한 명의 어른이 아이의 세계를 바꿨다. 세계는 좀 더 포근하고 아름답다고. 좋아하는 걸 당연하게 말할 수 있는 시간들이 세계의 구멍을 채웠다. 무너져가던 세계는 윤복이 되며 단단해졌다. 지지해 주는 어른의 사랑을 받은 아이는 그렇게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윤복은 이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애를 쓰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을 믿고 지지해 주는 어른이 만들어준 그늘에서 자신을 지키고 또 나아가는 법을. 자신 역시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는 단단한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너지지 않는 그늘 아래서, 아이는 마침내 온전한 세계를 마주했다.
출처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