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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Feb 21. 2024

어느 누구의 가치

버지니아 울프 - 『댈러웨이 부인』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던 대표작으로 현대에 이르러 그 가치가 더 높게 평가되는 소설 중 하나이다. 여기서 사용된 의식의 흐름 기법에 대해 말하자면 인물의 과거의 경험, 생각, 느낌 등을 인위적인 장치 없이 서술해 나가는 기법이다. 소설은 이에 따라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기승전결의 소설과는 다른 방식의 전개를 취한다. 말 그대로 인물의 의식을 따라가는 소설이기 때문에 기승전결식의 사건 전개는 거의 전무하다. 소설을 번역한 역자들 또한 대부분의 독자가 이러한 기법으로 인해 소설을 중도 포기하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번역가들 역시 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최대한 온전한 상태인 채로 책으로 엮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렇다, 이 소설은 읽어 내려가는 시간이 다른 소설에 비해 두 배는 걸린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의식적으로 기승전결을 쫓았다. 그 탓에 좀처럼 소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번역가가 남긴 설명을 보고 방식을 바꾸었다. 이 책은 기승전결을 의식하며 읽을 때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이었다. 번역가의 말처럼 기승전결을 의식하지 않은 채 책을 읽고 나니 이야기는 한결 더 부드럽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단순히 난해하다는 평을 들으며 읽는 것을 멈추기에는 전개가 될수록 더 가치가 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세계 1차 대전 이후에 영국의 하루를 다룬 이야기다. 단편에서나 볼법한 하루라는 시간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의식을 쫓으며 그들이 일상 속에서 겪는 순간을 쌓아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단순히 인물의 의식 위에서 함께 하는 것 같지만 그 인물과 엮여 있는 다른 인물에 대한 정보나 혹은 그에 대한 평가 때로는 그들이 바라보는 상황들에 대한 묘사를 엿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셉티머스의 죽음 정도를 제외하고는 사건이 ‘크다’라고 느낄 법한 일이 없다. 꽃을 사러 가는 댈러웨이 부인을 기점으로 소설의 장소는 인물들의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새로운 인물을 만나면 그 인물의 의식을 따라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다른 인물의 정보를 얻거나 새로운 인물을 통해 그 시대의 시대상과 가치를 접한다. 그들의 경험 속에서는 영국의 과거가 녹아 있고, 현재가 녹아 있다. 독자는 그들을 쫓으며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인물 간의 관계를 파악해 나간다. 결론에 이르러 클라리사의 ‘파티’에 그들을 집결시키면서 소설은 가장 빠른 속도로 그들을 비춰나간다. 때로는 그들을 접대하는 ‘안주인’ 역할을 수행 중인 클라리사의 눈으로, 비판적인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피터’나 ‘샐리’의 눈으로. 파티의 성대함과 함께 독자는 그들 사이의 관계와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인 모습의 그들과 내면의 또 다른 ‘그들’을 보게 된다.


  댈러웨이 부인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활용해 그 시대의 가치와 삶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의 의식을 드나들며 상류층의 삶을 보여주고, 때때로 상류층이 가진 허상과 그들의 민낯을 보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해 후유증으로 환상에 시달리는 셉티머스의 삶을 보여주며 셉티머스를 치료하기 위해 그를 진료하는 닥터 홈스와 브래드쇼로 대표되는 그 당시 정신과 의사들의 환자를 고려하지 않은 치료의 단면을 보기도 했다. 단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을 작가는 흐트러짐 없이 꿰어 나간다. 소설을 완독 했을 때 독자는 그 시대의 각 계급으로 대표되는 여성과 남성의 삶을 포함해 젊음과 늙음, 죽음과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보게 되는 것이다.      


  홈스가 오고 있었다. 면도날은 있을 텐데, 하지만 레치아가 늘 그러듯이 상자에 넣어 두었다. 남은 것은 창문뿐이었다. 블룸즈버리 하숙집의 커다란 창문, 창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던지는 것은 귀찮고 피곤하고 게다가 신파적인 일이었다. 그건 그 사람들 식의 비극이지, 그나 레치아의 방법은 아니었다. 홈스나 브래드쇼는 그런 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보자.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햇볕이 쨍쨍했다. 다만 인간들이―대체 그들은 뭘 원하나? 맞은편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한 노인이 그를 쳐다보았다. 홈스가 문 앞에 왔다. 옜다, 봐라! 그는 외치며 필머 부인의 울타리 철책으로 곧장 몸을 던졌다.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러 접하게 되는 셉티머스의 죽음은 소설 속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특이한 점은 죽음과 허상에 시달리던 셉티머스가 이 장면에 이르러 오히려 부인과 모자를 함께 만들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낸다는 것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셉티머스가 죽은 전우를 떠올리며 허상에 시달리고 이로 인해 점차 레치아가 괴로워하는 장면이 지배적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셉티머스는 자신이 레치아와 충동적으로 결혼한 것에 대하여 후회를 한다. 그는 기록을 위해 레치아를 그저 이용한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레치아 역시 허상에 시달리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려워 그것을 감추기 급급했다.


  레치아는 닥터 홈스와 브래드쇼에게 치료를 위해 그를 데려갈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셉티머스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 때 그는 허상으로 인한 자살이 아닌 닥터 홈스로부터, 입원으로 인해 사라질지 모르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자살을 택한다. 그를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했던 레치아는 그의 선택에 동조하며 이해를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자살을 택했던 버지니아의 죽음과 함께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셉티머스를 죽인 것은 병이 아닌 병원으로 인한 자유의 박탈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셉티머스의 죽음으로 인해 클라리사는 죽음과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그녀는 피터의 등장으로 그녀의 삶 속의 잔물결이 요동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리차드를 택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피터와 살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그 파장으로 시작된 잔물결은 그녀가 스스로의 삶이라 여기는 파티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곳에서의 자신이 맡은 ‘안주인’이라는 역할에 대한 생각을 말이다. 그동안 수차례 반복되었지만 피터와 샐리로 대표되는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들을 앞에 두고 그녀는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늙어 갈 거야. 중요한 단 한 가지, 그녀의 삶에서는 그 한 가지가 쓸데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려지고 흐려져서,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 갔다. 바로 그것을 그는 지킨 것이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그 중심이 왠지 자신들을 비켜가므로 점점 더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가까웠던 것이 멀어지고, 황홀감은 시들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은 팔을 벌려 우리를 껴안는다.
그런데(바로 오늘 아침 그녀 자신도 그랬지만) 두려움이라는 것도 있다. 부모가 손에 쥐어 준 이 인생이라는 것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 평온하게 지니고 가야 한다는 것에 덮여 오는 무력감. 그녀의 마음속 싶은 곳에도 끔찍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요즈음도, 리처드가 있어 주지 않는다면, 더타임스를 읽으며 그가 거기 있지 않다면, 그래서 그녀가 새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차츰 되살아나 마치 마른 가지를 마주 비비듯 그 한량없는 기쁨의 불꽃을 피워 내지 못한다면, 그녀는 도저히 더 살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두려움에서 그녀는 벗어났다. 하지만 그 청년은 자살을 한 것이다.    


 두 문단을 통해 클라리사는 자신의 삶에 잔물결을 정리하게 된다. 디 아워스의 한 장면에서 버지니아가 ‘누군가가 죽어야 남은 이들의 삶의 소중함을 깨닫죠.’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셉티머스의 죽음으로 잠시 흔들렸던 자신의 삶의 가치에 대한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만약 그의 죽음이 없었다면 그녀는 피터에게 흔들려 자신의 삶에 갈피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미스 킬먼이 바라는 것처럼 자신의 밑바닥의 모습으로 붕괴되어 파티 속에서 민낯이 공개되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분명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물들 간의 기승전결 구조를 만들어 그 당시 유행했던 사실주의적인 소설을 써 내려가는 일을 말이다. 그녀는 단순한 기승전결 구조가 아닌 의식의 흐름 기법을 택함으로써 여러 인물들의 인생의 가치와 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대담한 시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화 디 아워스를, 세월을, 댈러웨이 부인을,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에 진면목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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