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은 단순하게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함께 힘을 모아 생존해 감을 뜻한다. 공생이 가능하기 위해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이 있다. 염치와 배려다. 염치는 나를 높이는 도구고 배려는 남을 높이는 도구다. 단순하게 양 개체를 높일 뿐 아니라 관계에 윤활유를 가미하는 역할도 한다. 때문에 이 두 요소가 빠지만 관계가 형성되지 못할 뿐 아니라 반목과 갈등이 생긴다.
요즘을 관찰하면 염치는 개인의 이익에 밀려 사라지고 배려는 알량한 개개인의 자존심에 밀려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자기 입에 쌀 한 톨 더 집어넣기 위해 스스로를 비루먹는 거지새끼의 위치로 밀어버리는지가 이해되지 않고 어떤 교육을 받아왔기에 남을 존중하는 것을 자신이 불가촉천민이 되는 것과 동일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런 사람이 참으로 많다.
염치와 배려가 없으면 당사자는 살기 참 편하다. 말 그대로 그냥 살면 되고 요즘은 여기에 붙는 다양한 핑계들이 존재해 실드 치기에도 좋다. 자기 이익을 자기가 챙기지 않으면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다거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잘라다 ‘막’ 사는 삶의 가림막처럼 사용한다.
개인의 선택이라거나 타인의 삶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그냥 욕한 마디 내뱉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면 좋겠지만 염치와 배려의 부재는 연대의 파괴를 야기한다. 이 두 요소의 부재한 자리는 항상 극단적 이기심이 매우기 때문이다. 연대의 형성은 공유에서 발생한다. 공통으로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 가치가 있다면 연대가 형성될 수 있다. 이런 연대는 소규모 집단에서 그 소규모 집단 간에 그리고 대단위의 집단 내와 그 사이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되고 큰 틀에서 국가 단위의 연대의식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소규모 단위의 집단 내나 집단 간을 제외한 연대의식은 잘 찾아보기 힘들다. 이 소규모 집단의 연대를 제외하면 반목과 갈등의 형태만이 존재한다.
소규모 집단의 연대 또한 대부분 이익에 기반한 연대다. 왜 한국에서의 연대는 정신적 가치에 기반하지 못하는가? 아니 정신적 가치는 왜 배제되는가? 이익 중심의 연대가 나쁜 게 아니라 가치 중심의 연대가 존재하지 않거나 철저히 배제되는 현실은 비정상적이다.
한국은 공통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다. 식민지배와 독재라고 하는 아주 명확하게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이 있었지만 이들이 제대로 규정되지 못했다. 시민은 언제나 역사의 한 복판에서 큰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이 역시 부분적이었다. 더군다나 이 사건들을 제대로 규정하는 것은 지식인들의 몫이었고 이 사건의 의의를 시스템화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몫이었지만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빨리 타락하고 오염되는 세력이었다. 이들이 역할 수행에 실패하고 변질되면서 시민들의 의식도 참여한 자와 참여하지 않은 자 등으로 나뉘고 갈등이 발생했다. 때문에 이 사건들의 의의는 후대가 제대로 전승하지 못했다.
이렇게 단절된 역사적 경험은 공통된 의식과 정신을 만드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나마 2016년 탄핵정국은 대다수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성취한 역사적 결과물이지만 이마저도 아직 완전히 정립되고 규정되었다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게다가 공통된 의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장기간의 반복되는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연대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결속시킨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기존의 체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때문에 강력한 연대는 카르텔화 될 위험성도 있지만 반대로 연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 변화는 안정적 추동력을 지니며 힘 있게 추진될 수 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취하는 시스템이 이런 형태다. 변화가 자주 발생하지 않지만 필요한 변화는 확실하게 진행된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 지나치게 강화된 연대는 카르텔화 될 수 있으며 이미 한국에는 이런 카르텔들이 다수 존재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 문제를 개방성으로 해결한다. 카르텔은 뒷방에서 자신들의 이익 등을 위해 연대를 해 나가는 형태다. 기존의 법체계 내에서도 이런 변질된 연대는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들이 겉으로 대놓고 드러나는 일은 없다. 때문에 언론의 자유 등의 민주적 장치를 통한 개방적 사회 시스템으로 이들이 존재할 영역을 줄여버리거나 제거해 버리고 건전한 연대만이 존재하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이 역시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요원한 영역이지만 최근에 언론의 문제가 대두되는 근본적 원인 중의 하나는 여기에 기인한다.
갈등과 대립과 경쟁은 지극히 통제되는 범위에 서라는 전제하에 문명의 한 부분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는 자연 상태를 대변하는 요소들이다. 인류 문명은 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는 요소들을 가미해서 문명을 이룩해 왔다. 그러한 요소들 중 하나인 연대는 현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단편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 특징이 더욱 부각된다. 혹자는 이런 새로운 형태가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우리는 미래를 제단 할 수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런 방관으로 세계 대전을 비롯한 20세기의 숱한 전쟁들이 있어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대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한 만병통치 약은 아니지만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