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상.담.실
아빠 책 읽어줘!
늦은 밤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우유에 탄 커피 한 잔과 함께 신문을 볼 요량을 하고 있던 아빠는 덜 씹힌 저녁 찬거리들과 함께 아랫배에서 목구멍까지 짜증이 밀고 올라옵니다.
집에 돌아온 지 세 시간이 넘었지만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설거지에, 말끔히 청소까지 마친 뒤라 조금 화를 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거실에는 아내가 베란다 창을 열고 빨래를 털고 있습니다. 서리 낀 밤바람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듭니다.
그걸 꼭 이 밤에 해야 해?
둘째 아이는 그 순간 마시던 우유를 바닥에 엎지르고 손으로 문질러댑니다. 큰 방에서 이불 하나를 둘둘 말아 작은 방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분합니다.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자기 시간 좀 가지겠다던 작은 바람이 그렇게 어그러져 심사가 뒤틀린 겁니다.
유치원에 가려고 일어난 큰 아이가 아빠가 잠든 방을 찾습니다.
아빠 어제 왜 같이 안 잤어?
잠든 사이 혼자만의 시간을 애타게 찾던 욕망은 겨우 잠잠해지고, 그제야 본인이 아빠라는 자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미안함과 부끄러운 마음에 딸아이를 꼭 끌어안습니다.
어제 엄마가 아빠 대신 책 읽어줬어.
간밤에 아내는 빨래를 다 널고, 바닥에 흘린 우유를 훔치고, 아이들 책을 읽어주고서야 잠들었을 게 분명합니다. 정신이 든 아빠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합니다.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낫다. 엄마는 아빠보다 참을성도 있고, 요리도 잘하고, 빨래도 잘하고, 운전도 잘 하잖아. 아빤 잘 하는 게 뭘까?
큰 아이는 고민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빤 날 웃겨주잖아! 아빠의 정체를 어린 딸들이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듯하여 약간은 안심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