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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원인 Feb 08. 2017

족하지 않은가

민.원.상.담.실









예전 함께 일했던 직원 중에 한 사람은 지갑 속에 쿠폰을 많이 넣고 다녔다.

식사를 마치고 들르던 찻집에서 그는 계산대에서 내가 값을 치르고 돌아설 때쯤 득달같이 달려와 무슨 도장인가를 받아 갔다. 도장 열 개를 찍으면 캐러멜 마키아또 톨 사이즈가 공짜란다. 재밌게도 다른 찻집에 갈 때마다 그는 준비된 쿠폰 용지를 내밀었다. 산발적이긴 하지만 쿠폰마다 대여섯 개의 퍼런 도장 자국이 찍혀 있었다. 내 성향을 간파한 후로는 계산하러 나가는 내게 그 쿠폰 용지를 자연스럽게 내밀었다.


처음에는 알뜰한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얼굴을 마주하고 달달한 커피를 마시기엔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쿠폰 용지 모으는 데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ㄹ사의 명품가방과 사과 마크가 찍힌 스마트폰까지, 내가 낸 찻값 굳어서 그런 것들을 장만한 것 같은 피해의식이 들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과장님은 왜 쿠폰을 안 모으냐는 거였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공짜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게 엄청 많은데…. 뾰족 내민 입술을 보니 한눈에 근검절약 안 한다는 사인이었다. 억울했다. 난 그에게 커피 한 잔 얻어먹은 적 없었다.   

   

세상의 모든 상거래가 이 쿠폰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쿠폰이 등장한다. 주유할 때, 밥 먹을 때, 생일 선물로 옷 한 벌을 골라도 이 쿠폰의 등장과 더불어 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냥 주유 램프에 불이 들어왔을 때 주유하고, 먹고 싶은 음식 맛있게 먹고, 상대방이 기뻐할 만한 옷을 고르면 되는데 발길은 뭔가 내가 이득 될 상황과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다가 정작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잊게 된다. 내 얘기다. 나는 그 쿠폰 여왕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그 나물에 그 밥이었나 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고 숱하게 찬양하며 기도했지만 결국 쿠폰 챙기느라 헉헉 대고 있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알뜰 생활 플랜들. 기업들은 고객을 가족이라 말하며 이것저것 결합상품을 묶어 고객님들의 주름살을 펴준다고 선전한다. 장사꾼이 본전이다, 밑지는 거다라 말하면 왠지 더 불안하다. 그냥 심플하게 사용하고 싶은 것만 깎아주면 안 될까? 뭔가 묶고, 결합하고, 몇 년 사용하고… 어떤 회사는 저희 제품 이렇게 몇 년 쓰면 이만한 액수가 절약됩니다 하고 대신 계산까지 해준다. 소비자는 손해 보지 않으려고 지식 검색을 하고 블로그에 들어가 보며 난리를 피워야 한다. 그들이 이런저런 감언이설로 연막을 피우므로. 지친다… 다 내 얘기다.

내 귀한 찻값과 인간적 온정을 그깟 쿠폰 따위에 팔아넘긴 그는 사무실에 돌아와서 계산기를 두들기며 내내 푸념이었다. 카드값 메우고 나면 적자란다. 생활의 대부분을 공짜 쿠폰으로 요령 있게 사용하던 사람 치고는 의외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공짜 쿠폰을 모으기 위해 자주 마셔야 했고, 그만큼 사들여야 했다. 마그네틱 카드에 수많은 생채기를 남기고 전리품처럼 하나 얻은 공짜 쿠폰들이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우리네 삶이 어쩌면 커다랗게 짜인 쿠폰판 같은 느낌이었다.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될 텐데 남들이 뭔가 손쉽게 이득을 얻었다 싶으면 신경 쓰여 못 산다. 자신의 꿈을 좇아 익혀야 할 것을 즐겁게 취하면 될 텐데 영어다 논술이다 남들 좇아 갈지자로 걷는다. 족한 만큼 먹고살면 될 텐데 세상 혼자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부단히 애쓴다. 톨스토이가 《사람에게는 얼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속임수를 '심플'하게 들려준다.


지주로 둔갑한 악마가 바흠이란 사내에게 제안을 한다. 해뜨기부터 걷기 시작해, 해지기 전까지 돌아오면 그가 걸은 땅만큼 모두 바흠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그는 구름 위를 걷듯 내달리기 시작한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발걸음은 서서히 무거워지고 이제 그만 돌아갈까 싶지만, 그 안에 근면성실로 포장된 욕심이 쉴 새 없이 채찍질한다. 산 너머로 해가 질 무렵 바흠은 저 멀리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지주를 발견한다. 초초해진 바흠은 장딴지를 움켜잡는 피로함을 어금니를 꽉 깨물어 잘라내고 걸음을 서두른다.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쉬지 않은 그였다. 바흠의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눈앞에는 멀쑥하게 차려 입고 있던 지주가 아니라 악마 하나가 우스워죽겠다는 듯 낄낄거리고 있었다. 해가 지고 바흠은 고꾸라지듯 코를 박고 죽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묻힌 한 평 남짓한 땅이 주어졌다.


좋은 학교를 나와 외모 출중하고 똑똑한 배우자를 만나고 서른두 평 정도의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아파트와, 디자인 좋고 연비 좋은 에스유브이, 노후를 위한 저축과 연금 들, 세상이 짜 놓은 커다란 쿠폰 용지 위에 도장을 찍기 위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모님이 애지중지 길러주신 몸을 쥐어짠다.

근면성실이란 말이 미덕처럼 흐르는 자본 사회에서 능숙하지 못하면 허우적대다 결국 사라지는 육신들. 예수와 동행하는 삶이란 그가 걸어간 영광과 고난의 길을 함께하는 것임에도, 내가 선택한 예수는 이런 사회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성난 물결을 잠잠케 하신 그런 능력자였다. 내니 걱정하지 마라. 이런 나직한 음성과 함께.


오늘도 난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수입과 지출 이야기를 한다. 어디 새거나 뚫린 구멍이 없는지 살핀다. 피곤한 일이다. 우발적인 말다툼도 생긴다. 냉랭한 공기가 감돌 무렵 해가 떨어지는 산등성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난 바흠처럼 걷고 있지 않은가?

집안 곳곳을 웃음소리와 칭얼거림으로 채웠던 딸아이가 곁에 잠들어 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만족함이 느껴진다. 물끄러미 보다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정수리를 때린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혼이구나…. 세상 어느 것 하나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족도, 삶의 터전도, 잘 풀린다 싶어 한껏 들떴던 상황들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회복하라고 주신 건강과 물질과 시간이구나.


인구 70만 명의 히말라야 소국 부탄은 세계행복지도에서 8위를 차지했단다. 1인 당 국내총생산은 1978달러로 세계 122위다. 우리나라는 2만 591달러를 벌면서도 자살 1등 국가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아니라는 값비싼 임상실험 결과다.

회사를 그만두었던 쿠폰 여왕은 간헐적으로 연락을 해 왔다. 별일이다 싶었다. 그래도 목소리에 실은 내색 비추지 않았을까 염려하며 기분 좋게 응대했다. 몇 달 후 청첩장을 받았다. 아내와 함께 가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2년이 흘렀지만 연락 한 번 없다. 그날 결혼식이 마지막 쿠폰 도장받는 날이었나 보다. 관계의 끈만 놓지 않으면 당당히 손 내밀 수 있는 축의금이라 쓰인 몇 만 원짜리 공짜 쿠폰! 세상은 쿠폰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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