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상.담.실
몸이 유연한 걸 보니 날 닮았네.
미술 선생님이 사진을 찍어 보내 준 큰 딸의 그림을 보며 아빠는 말합니다.
이 나이에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을 하다니, 나도 어릴 때 그림 좀 그린다는 소릴 들었는데.
이제 막 태권도를 시작한 둘째가 이런저런 동작을 하며 기합을 넣자 아내는 말합니다.
쟨 날 닮은 게 확실해. 당신 운동신경 없잖아.
중 삼 때 체력장 특급이라고 아무리 해명해도 하룻밤 물에 불려 튀김 용으로 둔갑한 마른 오징어처럼 살찐 중년의 몸으론 과거의 영광을 증명해 낼 재간이 없습니다.
어제 지민이랑 영화 봤는데 옆에서 훌쩍거리더라. 열 살도 안 된 애가 말이야. 감수성이 날 닮은 게 분명해. 당신한테는 없는 거 같아.
자식에 대한 애정인지, 아이를 통한 자아 발견인지… 서로의 단점을 꼬집는 디스 전으로 치닫는 부부의 대화는 유치 찬란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그때 한 시간 넘게 방 안에 있던 큰 아이가 여러 가지 색깔이 섞인 고무밴드를 얽어 만든 팔찌 두 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빠, 엄마 거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또래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그 팔찌임에는 분명했습니다. 부모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닐진대, 아이는 능숙하게 팔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줌 싼 동생의 엉덩이를 씻기기도 하고, 생신을 맞이한 할머니를 위해 편지를 쓰기도 하고, 어지럽게 널린 현관의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한 것도 큰 딸 지민이었습니다.
마음 상한 엄마 곁에 기대어 등을 톡닥거렸던 것도, 아빠가 엄마에게 큰 소리를 칠 때 두 손으로 동생의 귀를 막고 아빠의 눈치를 살피던 것도 지민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누군가의 유전자를 닮아 그런 것도 아닌, 제 스스로 꼼지락대고 생각하고 멈추기도 했던 아홉 살 지민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부모와 세상을 향해 자신 만의 형태와 색깔을 드러냅니다.
눈은 아빠를 닮았고, 피부색은 엄마를 닮았고, 키가 큰 건 아빠, 머리 나쁜 건 엄마(?)…
자식의 모습에서 내 딸임을 나타내는 시그니처를 확인하려 했던 게 소유욕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