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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Oct 21. 2021

라면은 참 잘도 풀어진다.

우리네 삶도 이랬으면--

“라면은 잘도 풀어진다. 우리네 삶도 이랬으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나 보다.
벗은 라면을 젓다 말고 웃으면서 받는다.

“거 시 한 수 일세.”

온몸이 병치레를 하느라 야단이다. 야단인 병치레는 마음까지도 주눅 들게 만든다. 늘 사는 세상이건만 세상이 더욱 강고해 보인다. 


이지가지 여러 일들이 새삼 떠오르고---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삶이 난마처럼 내 주변에 얽혀있다.


생각을 재우려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을 읽는다. 점심이 되려는지 시장기가 돌지만, 날씨도 추운데 혼자 식당을 찾는 것도 영 모양새가 그렇다. 오늘도 점심은 간단하게 물 한 컵으로 속일 양이다. 그렇게 잠시 책을 덮고 점심을 생각할 즈음, 인천에서 회사를 꾸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속을 잘 알아주는 벗이다. 잠시 회사 문 잠그고 나에게 오겠단다. 내 안부도 물을 겸 점심이나 하려고.


점심은 김치찌개. 저나 나나 주님과는 정다운 사이요,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고 낙엽이 뒹구는 날, 선술집에서 대작은 주당들이 애호하는 몇 안 되는 멋진 술자리다. 


잠시 맑은 소주잔에 비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나이건마는 영 낯설다. 시나브로 세월이 그렇게 지나갔나보다. 그러고 보니 벗의 얼굴도 전과 다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반찬 삼는다. 여간 맛있는 밥상이 아니다. 찾아 준 벗이 새삼 고맙다. 김치찌개에 라면까지 넣었다. 벗이 라면을 젓는다. 라면은 참 잘도 풀어졌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라면은 잘도 풀어진다. 우리네 삶도 이랬으면---.”

벗이 웃으며 던진 ‘시 한 수’란 말이 정겹다. 갑자기 연암 선생의 <동란섭필(銅蘭涉筆)>이 떠올랐다. 동란재(銅蘭齋)에서 쓴 잡문 정도라는 의미이다. ‘-섭필’은 잡문이지만 글로 조금도 손색없다. 그러고 보니 내 서재 이름이 휴헌(休軒)이다. ‘휴헌섭필’ 또한 어떠랴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잔을 들었다. 참 맑다. 온 몸에 맑은 소주가 핏줄을 타고 흐른다. 라면은 참 잘도 풀어진다. ‘휴헌섭필’ 한 편 써야겠다. 라면 처럼 술술 풀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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