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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Nov 01. 2021

<산행(山行)>

산에서 본 하늘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습니다.

<산행(山行)>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산길을 가노라면 앉아 쉬기를 잊고 쉬다 보면 오르기를 잊어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망좌좌망행)

소나무 그늘 아래서 말을 멈추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네. 歇馬松陰聽水聲(헐마송음청수성) 

내 뒤에 오던 몇 사람이 나를 앞질러서는 가버렸는가 後我幾人先我去(후아기인선아거)

각각 멈출 곳에서 멈출 것이거늘 또 무엇을 다투리오.各歸其止又何爭(각귀기지우하쟁)

  

 언젠가 도봉산을 혼자 오를 때였습니다. 

산 초입에 막 들어섰을 때입니다. 건장한 사내가 성큼 내 옆을 휙 스쳐서는 저만큼 앞서 휘적휘적 산을 오릅니다. 산을 많이 타본 듯 차림새도 여간 아닌 것하며,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모릅니다. 이내 산모퉁이를 돌더니 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처음엔 천천히 산자락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였지만-, 이쯤 되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어느덧 내 걸음도 빨라지고, 앞에 가는 이를 한두 사람 따라잡습니다. 기분이 제법 상쾌한 것이 그 맛이 여간 쏠쏠한 게 아닙니다. 


등허리가 촉촉해지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지도 꽤 흘렀습니다. 웃옷조차 벗지 않고 따라붙었지만 앞서 간 그 사내는 보이지 않습니다. 더 빨리 걸음을 재촉합니다. 


얼굴이 완연 붉어지고 숨이 턱에 찰 때쯤, 그 사내가 길 한편 짝에 비껴서 손전화를 받는 뒷모습이 보입니다. 지나치며 슬쩍 보니 사내의 얼굴이 막걸리 두어 사발은 족히 들이킨 듯 꽤나 불콰한 것이 여간 사나운 게 아닙니다. 꽤 걸쭉한 육두문자까지 두어 마디 섞여 들립니다. 


헛웃음이 나옵니다. 사람 사는 세상, 그 세상 맛 쌉쌀하여, 사람에 치여 산을 찾았거늘. 산에서조차 사람에게 이토록 완강한 집착을 보이다니 말입니다. 평평한 바위 한 켠에 몸을 맡겨봅니다. 


사내는 이내 나를 지나치더니 또 저만치 사라집니다. 


산바람이 아는 체, ‘슬쩍’ 내 몸을 건드리고 지나간 하늘을 바라봅니다. 산에서 본 하늘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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