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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Nov 03. 2021

<책꽂이 단상>

"모두 함께 만든 셈이니, 내 책도 따지고 보면 내 책이 아니랍니다."

"'선생님! 거 좋은 책꽂이를 누가 버렸던데요."


바람을 쐬러 나가는데 마음씨 좋은 경비 아저씨가 불러 세웠다. 내 휴휴헌을 보고 책이 많다고 천진하게 웃음 짓는 분이다. 그래서인지 두어 번 좋은 책꽂이를 나에게 챙겨 주었다.


이번 것은 큼지막한 책장으로 썩 마음에 들었다.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책꽂이를 가져와 걸레질을 하니 새로 산 것과 진배없었다. 이리저리 구상 끝에 티브이가 있던 벽면을 치우고 세우니 방 구조도 달라졌다.


책을 꽂고 몸을 씻고 누워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책을 좋아하는 나다. 좋다! 쌓아 두었던 책이 제법 좋은 집을 찾은 듯도 싶고.-----무섭고 두려운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듯한 이 휴휴헌이 더 아늑해 보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문득, 책이 보였다.


책꽂이에 꽂힌 저 책들, 깨알 같은 글자들로 세상 지식을 담아낸 저 책들, 온몸으로 써냈을 지은 이들, 대박을 꿈꾸며 책을 만든 출판인들, 저 책을 만들기 위해 종이를 만든 이들, 그 수많은 이들과 그 곁에 있는 이들,-----, 그리고 종이의 재료인 나무와 그 나무를 자라게 한 비, 바람, 흙 등 자연현상까지------


언젠가 강의에서 이현주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모두 함께 만든 셈이니, 내 책도 따지고 보면 내 책이 아니랍니다."


슬그머니 생각은 책 속으로 들어간다. 한 번쯤은 내 손을 거친 저 책들의 파리대가리만한 글자들, 하나같이 진리를 서술하는 문자들의 향연. 나는 저 글자들 중 몇을 알고 실행하나? 학문의 끝이 위기지학이요, 자득지학이라하였다. 내가 처음이요, 내가 나중이란 뜻이다. 나로 시작하여 나로 끝나는. 그런데 나는 혹 저 문자들의 향연에 취하여 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저 책 속의 문자처럼 행동을 하였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갑자기 책들이 무섭다. 파리 대가리만 한 활자들이 하나하나 살아나 나를 매섭게 노려 보는 것 같다. 그렇잖아도 세상이 무섭고 사람이 무서운 나다. 요령 있는 삶은 애초부터 내 삶과 먼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 휴휴헌이 좋고 책에 더 애착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벗처럼 여겼던 책까지 무섭다니.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 휴휴헌을 나왔다. 


마음씨 좋은 경비 아저씨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사 드려야겠다. 그리고 "이제는 책꽂이 놓을 데가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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