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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Nov 08. 2021

나에게 부치는 편지

그러니, 그렇구나 하고 오늘만 잘 살아가시게나.  ​

휴헌!

쨍쨍한 여름날보다는 오늘처럼 가을비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 깔깔거리는 웃음보다는 눈가 훔치는 눈물과 친하지. 


휴헌, 자네 휴휴헌 창에 빗방울들이 착 들러붙어 있더군. 고뇌, 어둠, 고독, 오만, 편견, 좌절, 우울, 세속, 침묵, 오기(傲氣)----로 해석하지. 욕망의 사생아들로 말일세. 여보게 휴헌, 저 빗방울들을 오이처럼 따다가 초무침하여서는 초탈, 밝음, 행복, 달견, 희망, 명랑, 달관, 탈속, 대화, 자부(自負)----로 만들면 자네 삶이 괜찮겠나? 

 

휴헌, 이런들 저런들, 거기가 거기인 와각지쟁(蝸角之爭)인 인생사요, 초로(草露) 같은 삶일세. 그저 직수굿이 제 길이니 제가 만들어 가는 것, 저쪽 길을 건너다볼 필요가 무에 있나. 


휴헌, 도도한 재기가 없어도 몇 자 글은 쓸 줄 알고 고매한 인격은 아니라도 남에게 손가락질은 받지 않고 현하지변은 아니라도 말은 곧잘 하잖은가. 살림살이 곤궁하니 궁상맞은 선생이라 하여도 세끼 밥 굶는 것도 아니지 말일세. 또 자네 나이 적지 않건마는 아직도 정직, 담박, 청빈, 정의, 도덕, 청렴, 예의, 학문, 존엄, 진실, 따위 어휘들을 꽤 좋아하고 슬프면 눈물 흘릴 줄 알고 싫은 것은 싫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 하고 잘못된 것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사랑할 줄도 아는 인간미가 있잖나. 


휴헌, 자네가 비록 호방하고 걸출한 국가 동량은 못되나 선생으로 인재를 기르려 애쓰고 선인들의 글을 읽어 몇 권 책도 세상 빛을 쬐게 했고 제 몸을 가꿀 줄도 알고 부족한 깜냥을 메꾸려 부지런히 책상에 앉을 줄도 아니, 아직 글방퇴물은 아니란 말일 시. 


휴헌, 삶이란 게 어디 정해진 길이 있던가. 공명이니, 영달이니, 부귀를 이룬 들 어디 행복이 지천으로 널렸고 천만 년을 살아내든가. 


휴헌, 그러니, 그렇구나 하고 오늘만 잘 살아가시게나. 

2021년 11월 8일, 휴휴헌에서 휴헌이 휴헌에게 편지를 쓴다. 

 

추신 두 어 자: 이렇게 내가 나에게 위무(慰撫)하는 척독(尺牘)을 보내어 어루만지고 달래 본다. 그래야 이 세상을 살아낼 힘을 좀 얻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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