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냥, 오늘은 그게 내 마음이야."
"선생님! 오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끼는 제자에게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제자는 내 블로그를 꼼꼼 보는데, 아마 브런치에 써 놓은 글이 좀 흔들려 보인 듯하다. 난 이렇게 말했다.
"응! 그냥, 오늘은 그게 내 마음이야. 글을 거짓으로 쓸 수는 없으니까. 솔직해야지.---"
<거짓 없는 솔직함(直而無僞)>
조선 후기의 선진 학자들이 말하는 성령(性靈) 또한 이 진정성을 말한다. 성령은 우리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마음이니 글 쓰는 이의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말한다. 따라서 ‘글을 쓰는 이는 형식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이를 써라’는 것이 이 성령론의 주문이다.
문장력이나, 표현에 있어서 소박한 글이지만 글 속에서 글쓴이의 진정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면 된다. 화려하여 볼 것 많고 들을 것 많은 글도 좋지만, 담박한 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수더분함이 오히려 내용 있는 글로 나아간다. 진정으로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러한 글쓰기를 정약용 선생은 “맛 좋은 술이 입 안으로 들어오면, 얼굴에 붉은빛이 도는 것이란다(猶酒醪之灌於肚 而紅潮發於顏面也)”라고 설명하였다.
앞 문장은 다산 선생이 제자인 <이인영에게 주는 글(爲李仁榮贈言)>에 보인다. 이 글은 문장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다산 선생은 제자에게 문장이라는 것이 ‘맛 좋은 술이 입 안으로 들어오면 얼굴에 붉은빛이 도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글쓴이가 자신의 진실하고도 순수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자연스럽게 이를 써야겠다 싶어 쓴 것, 이것이 바로 다산 선생이 말하는 문장이다. 이러한 글이라야만 글쓴이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음식으로 쳐 문체의 수식을 고명이요, 짭조름히 간을 맞추는 것이라 하면,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성은 음식 바탕인 재료이다. ‘알심 있는 글’의 출발점은 여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봉건왕조에서 일제 치하를 거쳐 독재정권까지 남은 글들은 모두 저 순수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지어진 것들이다.(이 순수한 마음이 없으니 표절 논문에 대하여, "20년 전에는 석사논문으로 문제없지만 오늘날은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이 나온다. 20년 전이든, 200년 전이든,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세상에 잇속을 댄 책과 독서계에 야합하는 글들이 많은 세상이다. ‘부처님 반 토막’ 같은 소리요, ‘말만 귀향 보낼 넋두리’ 일 터이지만, ‘저 재주들을 이렇게 써야 만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짓, 위선이 설쳐대면 순수와 진실이 설 자리는 없다. 순수와 진실이 글의 변방에 위치하면 그것은 더 이상 글이 아니다. 글을 쓰는 자, 어린아이처럼 도덕적으로 무잡하고 순결한 심성을 가져야 한다 함은 이런 의미에서다. 이 마음이 없는 자 글을 쓸 수 없고 글을 써도 글이 아니니, 글쓰기는 눈썰미로 밀어붙이는 학습이나 기술 연마가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글쓰기를 통해 출세나 해보려는, 혹은 가방끈이나 늘리려는, 혹은 재간으로 붓장난이나 부려 매문(賣文)이나 하려는 속됨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진정, 이 인위적인 가식이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표현하였을 때 비로소 글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로서 글을 쓰고 싶은 설렘, 문자와 문장과 단락의 어울림, 독자가 책에 끌리는 순간도 여기서부터다.
‘거짓 없는 솔직함(直而無僞)’, 이것이 글의 정신이요, 글 쓰는 자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