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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Mar 16. 2022

글이 나를 죽인다

노동한 손의 부산물, 아니면 근로한 뇌의 사생아.

글이 나를 죽인다.

그러므로 아래 써 놓은 글은 의미 없다. 써도 쓴 것이 아니기에 읽어도 읽은 게 아니다.


'글 따로 나 따로!' '서자서 아자아!' 연암 선생이 지극히 경멸했던 사이비 향원이다. 책 몇 자를 보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여기다. '어떻게 글은 저렇게 고상하고 멋진데 행동은 이렇게 치졸하고 저급할까?'에서 오는 책깨나 읽은 이들의 파르마콘(pharmacon, 약과 독)-적(的) 인간군상이다. 글의 이중성, 치유와 질병, 진정과 가식을 모두 지닌 글을 꿰뚫어 본 플라톤은 파르마콘이라 하였다. 


누군가 내 글을 '글 따로 나 따로'라고 한다면, '당신의 글은 의미 없는 문자의 나열 아니요?'라 묻는다면 난 어떻게 답할까? 노동한 손의 부산물, 아니면 근로한 뇌의 사생아.


정녕 내 글은 나인가? 아니면 나 또한 내가 경멸하는 이들처럼 내 글과 내가 각성받이인가? 그래 파르마콘적 인간이 바로 나인가? 내 글을 읽은 누군가에게 의미 없는 글이고 의미 없는 존재란 말인가? 엿장수 가위질처럼 맘대로 궁벽스럽게 마음 없는 생각을 잘라놓은 파리대가리만한 먹물덩어리란 말인가? 


글 쓰는 이라면 임금 앞에서도 옷을 벗어젖히고 벌거숭이로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야하는 해의반박(解衣槃礴)이란 오연한 자존이 있어야하거늘 내 맘을 내가 거짓으로 그려 놓았단 말인가? 더욱이 내 글쓰기 책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의 첫 장이 '마음'인데…간단없는 생각에 주저앉는 자괴감.


이제, 내 글이 나에게 묻는다.

"어이! 간 선생! 나를 글이라고 써 놓은 당신! 당신의 마음이 진정 나요? "


글이 무섭다.

아니, 이 글을 쓰는 내가 무섭다.

이쯤이면 글이 나를 죽인다. 


(글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에 오는 필연적 오독 및 오해는 이 글과 상관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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