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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Mar 22. 2022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5)

사이비(似而非), ‘사람 사는 세상’ ‘향원 없는 세상’을 꿈꾸며

오늘, <인천일보> 조간 15면입니다/.

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6077

[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5) 사이비(似而非), ‘사람 사는 세상’ ‘향원 없는 세상’을 꿈꾸며

문장 : 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
성정 : 개를 키우지 마라
학문 : 기왓조각과 똥거름이 장관
미래 : <연암집>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

20대 대선이 지났다. 활짝 웃는 당선자 얼굴을 담은 당선사례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다. 정녕 국민화합 운운하는 20만 표 승자의 당선사례로 매우 볼썽사납다. 상대 당에 표를 던진 국민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선인에게 한 기자는 “외람되오나(猥濫되다, 하는 짓이 분수에 지나친 데가 있다)”라며 자신을 한껏 낮추었다. 저 말은 왕권국가에서나 쓸 말이다. 대선을 지나며 무례(無禮·예가 없고), 무의(無義·옳음이 없고), 무렴(無廉·염치가 없고), 무치(無恥·부끄러움이 없고)를 보았다. 무식(無識·앎이 없고), 무법(無法·법이 없고), 무도(無道·도덕이 없고)한 가히 부조리한 세상의 사이비들이다.

섭씨 233℃ (화씨 451도)는 책이 불타는 온도다. 종종 언론통제용 상징으로 쓰이는 이 말은 진실과 정의의 소멸이라는 '지(知)의 비극적 은유'를 내포한다. 연암 손자뻘인 박남수는 <열하일기>가 못마땅하다며 불을 붙였다.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는 <화씨 451도>에서 '불태우는 일은 즐겁다'로 시작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의 세계를 그렸다.

이틀에 한 번꼴은 7옥타브쯤의 고성을 내뱉는 아마겟돈 같은 세상이기에 순결한 양심을 간직하고 살아감이 그만큼 고통이다. 글깨나 읽고 쓴다는 자들의 책 따로 나 따로인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저 시절 진실을 외면하려 했던 박남수의 행위는 지나간 현재와 미래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다. 이 시절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과 같은 실학자들의 삶과 글이 현재성을 띠는 이유요, 우리에게 비수처럼 꽂는 성찰이요, 미래의 예언이다. 구정물 같은 세상, 연암 삶과 글로 정수처리 좀 하여 '오이 붇듯 달 붇듯' 진리, 정의, 양심이 넘실거리는 세상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사이비는 아니 되련다!' 연암 평생 화두였다. 사이비란, '두루뭉술 인물'인 향원(鄕愿)이다. 향(鄕)은 고을이요, 원(愿)은 성실이다. 즉 고을의 성실한 사람으로 '도덕군자'란 뜻이니, 백성들의 지도자다. 연암은 이 향원을 무척이나 싫어하였고 저런 사이비들로 인하여 마음병을 얻었다. 향원이 실상 겉과 달리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아첨하는 짓거리를 하는 자'요, '말은 행실을 돌보지 않고 행실은 말을 돌보지 않는 겉치레만 능수능란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맹자> '진심장구 하'에서는 향원을 “덕을 훔치는 도둑놈(德之賊)”이라 꾸짖었다. 연암은 저러한 현실을 직시했고 사이비가 되지 않기 위해 “글자는 병사요, 뜻은 장수이고 제목은 적국”이라 규정하고 전쟁하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하였다. 남과 다른 삶을 살고 글을 쓴다 하여 세상은 연암을 문둥이, 파락호, 술미치광이라 불렀고 연암은 스스로를 '조선의 삼류선비'라 칭하였다. 조선의 삼류선비 연암이 꿈꾼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바로 연암 삶의 결절(結節)인 문장, 성정, 학문, 미래이다.

문장(文章)이다. “종로를 메운 게 모조리 황충(蝗蟲:벼를 갉아먹는 메뚜기)이야!” 황충은 백성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양반을 통매하는 풍류다. 한문소설 <민옹전>에서 연암은 문벌을 밑천 삼고 뼈다귀를 매매하며 무위도식 양반에게 입찬소리를 해댔다. 요절한 학자 김현은 <분석과 해석>에서 “이 세계는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한다. 작은 이야기 '소설(小說)'은 그렇게 큰 이야기인 '대설(大說)'을 꿈꾼다. 연암 대설은 지금으로 치면 자칭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라 설치는 황충류에 대한 일갈이다.

성정(性情)이다. “개를 키우지 마라” 연암 성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또 개를 기른다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죽인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느니만 못하다.” 말눈치로 보아 '정 떼기 어려우니 아예 기르지 마라'는 소리다. 계층이 지배하는 조선후기, 양반이 아니면 '사람'이기조차 죄스럽던 때였다. 누가 저 견공(犬公)들에게 곁을 주었겠는가. 이것이 연암 삶의 동선이다. 지금도 학문이라는 허울에 기식(寄食)한 수많은 지식상(知識商) 중, 정녕 몇 사람이 저 개와 정을 농하겠는가?

학문(學問)이다. “기왓조각과 똥거름, 이거야말로 장관일세!” 실학자 연암은 청나라 여행 중, 끝없이 펼쳐진 요동벌에서 '한바탕 울고 싶다!' 하였고 기왓조각과 똥거름을 보곤 '이거야말로 장관!'이라 외쳤다. 연암은 정쟁으로 날을 새는 소국 조선의 선비였다. 그래 저 거대한 요동벌에서 한바탕 울음 울었고 기왓조각과 똥거름에선 학문의 실용을 찾았다.

미래(未來)이다. “<연암집>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 춘원 이광수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유를 물은 데 대한 개화파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답이다.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다. 유학은 사람다운 사람 사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지향하지만, 저 시절 그런 조선은 없었다. 연암은 유학자로서 조선의 아름다운 미래를 글(<연암집>)로 설계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주역들이 읽은 책이 바로 <연암집>이었다. 우리가 찾는 세상도 연암이 그린 '사람 사는 세상''과 다를 바 없다. 문둥이라 불린 조선의 삼류선비 연암이 뿌린 '사람 사는 세상'이란 역병이 우리 조선의 후예들에게 강하게 전염되기를 바란다. 그 날이 <연암집>의 먹물들이 글발마다 살아나 열을 지어 행진하는 '인간다운 세상' '사이비(향원)' 없는 세상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인하대학교 초빙교수/고전독작가(古典讀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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