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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Mar 29. 2022

집착(執着)에 대한 묵상(默想)의 묵상(默想)

아직도 즐거움이 반이나 남았으니 말이다.

집착(執着)에 대한 묵상(默想)의 묵상(默想)


엉킨 실타래처럼, 꽉 막힌 하수구처럼, 긴 터널처럼, 그런 날들이 있다. 생각은 뒤엉키고 묵상은 끝이 없고 글은 한 줄도 못 나간다. 거울을 보니 눈에 핏발이 섰다. 이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집착은 인간만이 갖는 괴로움이다. 인간은 하나의 역사이며 세계다. 나는 강산이 여섯 번 넘게 바뀐 세월로 만들어낸 내 꽤 고단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세월만큼 커지거나 넓어지지 않는다. 어린아이 세월에서 부처의 세계도 보고 백발 늙은이 세월에서 좁쌀만큼 작은 세계를 보는 이유다.


내 세월과 내 세계가 오늘, 이런 집착을 만들었다. 내 세계가 좁으니 집착이 들끓고 괴롭다. 집착의 근원은 잡으려는 욕망이다. 집착과 이웃한 아집(我執), 고집(固執), 인집(人執)은 모두 잡으려는 집(執)이다.


이 집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 무명은 모든 번뇌의 근원이다. 무명의 중생이 나고 무명을 벗어나려면 놓으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집착은 여기서 사라지니 방법은 내려놓는 해(解)이다. 해는 해탈(解脫)이다. 해탈은 번뇌의 얽매임에서 풀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다. 생각의 끊어짐이다. 많은 선각자들은 이 해탈에서 도를 얻는다고 한다.


내가 만든 집착이니 내가 해탈하면 된다. 그런데, 집착이 사라지고 해탈이 온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도를 얻은 선각자의 삶은, 그 삶은 평화일까? 온화일까? 행복일까? 혹은 모든 고통이 사라질까? 그도 아니면 삶의 길이 보일까? 아니, 정녕 깨달음 한 자락쯤 있을까? 도 깨달은 이를 단 한 분도 만난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탈보다 집착이 더 인간적이다.


‘인생 백 년에 고락(苦樂, 괴로움과 즐거움)이 상반’이란다. 세상사에 집착하는 나, 오늘을 사는 내 삶의 묵상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을까. 굳이 해탈을 해 무엇하리오? 아직도 즐거움이 반이나 남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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