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이비 셋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헌 간호윤 Sep 09. 2021

주문[朱門], 그 붉은 대문 안의 이들

나는 향원이 아니 되겠다

                                                                                                           

『기인기사』(상) 번역을 하다가 ‘주문[朱門]’이란 말을 보았다. ‘주문’은 붉은 칠을 한 문으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호화로운 집을 말한다. 두보(杜甫,712~770)의 시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

고관들 집에서는 술과 고기 썩는 냄새요 朱門酒肉臭(주문주육취)

길거리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더라 路有凍死骨(노유동사골) 

--------------------------------

두보, <자경 부봉 선현영 회오 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에서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쾌락에만 빠져 지내는 중신들을 꾸짖는 시이다. 


저 나라든 이 나라든, 세월이 흐르며 ‘왕과 귀족의 나라’에서 ‘백성들의 나라’로 바뀌었다. 하지만 세상 불평등하기는 그때나 이제나 아롱이다롱이다. ‘잘 사는 20: 못 사는 80’은 이 시대에도 진행형이다.


인간은 분명 존엄한 존재로 평등하게 태어났다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그 원인을 ‘사유재산 제도’에서 찾았다. 루소는 개인의 가치가 존재에서 소유로 바뀌며 이런 불평등이 만들어졌고 국가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고 하였다. 


약삭빠른 자, 힘 있는 자는 국가의 우듬지에서 더욱 부와 향락을 누리고 국가로부터 법과 제도로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는다는 해석이다.


이쯤이면 토마스 홉스의 말처럼 ‘사람은 사람에게 있어 늑대[homo homni lupus]’이다. 그렇다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도 어렵다. 인간은 누구나 이 땅(지구)의 세입자로서 당당한 자연인이다. 그러나 세입자들 중 일부가 이 땅의 주인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힘없고 소외된 자들은 자연인으로서 권리마저 박탈당했다. 이미 지구(혹은 한 나라)의 주인이 되어버린 저들에게 복종하거나 기생해야만 최소한 일용할 땟거리를 얻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힘과 권력이 몰려 있는 저 여의도 ‘주문[朱門]’에서는 오늘도 누구를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있을까? 코로나 19, 저 이들과 그 보다 많은 일부 이 나라 선택받은 20%쯤 되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저 이들과 선택받은 이들은 오늘도 국가로부터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방법서설』을 읽다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