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13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13 윤석열의 쿠데타 이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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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7. 3.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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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13
윤석열의 쿠데타 이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실용’과 ‘국민주권’을 내세운 이재명 정부가 놀랍도록 빠르게 돌아간다. 각료 임명이나 정책이 확실히 예전과 달라지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엊그제 어느 자리에서다. 늘 자신을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의 말이다. 정리하자면 대략 이렇다. ‘전 대통령 윤석열이 잘못했지만 그의 실패한 쿠데타로 인하여 이재명 정부가 탄생하였다. 또 뭐 다친 사람들도 없다. 그러니 그의 잘못을 좀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논리다.
프랑스 경제학자 프레데릭 바스티아(Frederic Bastiat,1801~1850)의 유명한 글이 있다. 1850년에 발표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이다. 이 글은 경제학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매우 깊은 영향을 끼친 에세이로, 경제 현상에서 단기적으로 ‘눈에 보이는 효과’만을 보는 것과, 장기적이고 간접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를 간과하는 오류를 비판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나 행동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효과(보이는 것:What is seen)는 쉽게 본다. 그러나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간접적이고 장기적인 결과(보이지 않는 것:What is not seen)는 자주 무시한다는 내용이다. 바스티아는 경제적 사고를 하려면 이 숨겨진 기회비용과 영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든 대표적 예시가 ‘깨진 유리창 이론(Theory of broken window)’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이렇다. 한 불량소년이 가게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치자. 그러면 사람들은 주인이 새 유리창을 사게 되어 유리공에게 돈이 간다고 생각한다. 그 유리공은 돈을 벌었기에 소파를 구입했고 또 소파를 판 가구상은 그 돈으로 정육점에서 고기를 샀다.…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깨진 유리창으로 인하여 유리공이 일감을 얻게 되고 가구상, 정육점 주인에게 경제적 효과가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한다. 가게의 유리창을 깨뜨린 ‘한 불량소년’의 행동이 지역 경제를 위한 바람직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파괴’가 ‘미덕’으로 둔갑하는 역설적인 순간이다.
이런 식의 합리화는 보통 불행한 일이나 나쁜 일을 합리화하는 경우에 쓰인다. 담배꽁초를 길에 버려 이를 나무라자. “쓰레기나 담배꽁초가 길에 있어 지저분해야 청소하는 직업이 있지. 길이 깨끗하면 청소부가 왜 필요하겠어”가 그 흔한 예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바스티아의 견해를 따라가 본다. 한 불량소년이 깨뜨린 유리창으로 인하여 가구상에게도, 정육점에게도 돈이 간 것은 맞다(보이는 것) 하지만 부가 새로 창출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그 유리창을 고치느라 다른 곳에 돈을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유리창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 돈으로 옷을 사려했다. 그렇다면 옷가게 주인에게 갈 돈이 유리공에게 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옷가게 주인은 그 돈으로 식품을 살 것이고 식품점 주인은 신발을 살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
즉, 유리공이 벌게 된 돈만큼(보이는 것) 옷가게 주인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보이지 않는 것)는 말이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 혹은 의도치 않은 결과’이다. 깨진 유리창으로 돈이 돈 것도 아니고 깨진 유리창도 비용을 들여 원상 복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파괴가 부를 창출한다’는 것은 ‘기회비용’을 생각지 못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스티아의 최종 결론이다.
윤석열 정부의 3년, 그리고 쿠데타 후유증이 가져올 보이지 않는 기회비용이 얼마인지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방위에 걸쳐 우리가 지불해야 할 ‘보이지 않는 기회비용’이 얼마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2.3내란이후,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있는 ‘쿠데타 트라우마’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심연(深淵)을 곰곰 응시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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