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고통스럽다 당연히
그것들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럴듯한 차가 있어야 남루한 나보다 차를 먼저 봐줄 것 같고, 전세는 살아야 소개팅이라도 들어올 것 같고, 정규직에 연봉이 최소한 3천은 넘어야 아사(餓死) 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들. 그와 더불어 무언가를 매번 구입하고 소유하지 않으면 스스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필리핀 섬에 들어오니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 집착에서 벗어났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것들에 집착했던 이유는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한 콤플렉스. 단추가 어디서부터 잘못 채워지기 시작했는지는 생각지 않고 넥타이 매기 바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착한 사람 돈 많은 사람 잘생긴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콤플렉스.
나는 착하지 않다. 예수와 싯다르타를 위대하게 생각하지만 종교시설은 나가지 않고 어디 한 군데 기부하는 곳도 없으며 아무튼 착하지 않다. 그런 내가 착해 보이려, 돈 없지 않아 보이려 노력하는 게 얼마나 스스로 갉아먹는 짓인지 알게 되었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자유롭다. 그 자유는 당연히 고통스럽다. 나는 들국화인데 사람들은 모두 장미를 원한다 그럴 때 '니미 어쩌라고?'가 된다는 얘기다. ('니미' 이건 욕이 아니다. 일종의 추임새라고 할까. '씨발'그러면 뭔가 이생 해도 '니미' 그러면 듣는 사람이 잠시 뜻을 생각하게 된다. 독자분들도 속으로라도 추임새는 하나씩 만들어 두기를 권한다. 요긴하게 치유용으로 쓰일 상황이 많다. 참고로 '젠장' '이런' '어쩌지' 이런 것들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
그런 집착에서 당장 벗어날 의지가 없다면(대부분 비겁해 지기 싫어서 스스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방법이 있다. 우선 SNS를 안 하면 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대에게 일말의 희망은 있다.
상황마다, 사람마다, 나라마다 차이는 당연히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 한건 자유는 고통이다.
너무나 당연한 거다. 이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것들(포기라고 표현들을 많이 하지만 정확하게는 버리는 거다.)은 생각보다 많다.
밤늦은 시간, 주머니에 신용카드가 있고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와 라볶이 둘 줄 하나를 선택해서 먹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은데 주머니엔 2천 원밖에 없을 때 그걸 사 먹고 당당하게 걸어서 집에 가는 게 자유다.
집에 걸어가는 길에 떡볶이 사 먹은걸 후회한다면 그건 그대가 진정으로 원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런 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이건 방법이 없다. 해 봐야 안다. 해 봐야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유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이라는 게 경험해보기 전에 두려워하는 것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다. 뭐랄까, 가방끈이 짧아서 글로 풀이가 되지 않지만 그렇게 쫄 필요가 없다는 건 분명하다.
그대가 자유롭다 느끼지 못하는 건 시도도 해 보지 않고 고통을 두려워해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