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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나 Jul 09. 2019

제대로 마음을 쏟지 못했을 경우엔

하루에 최소한 한시간은 마음을 고요히 비운 다음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무슨 글이든 다 상관 없이 써 보기로 했다.

사실은 죽도록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내 이야기들은 아직도 

아이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상징적이고 경직되어 있다.

그래도 매일 무의식과 대면하여 써 나가기 시작하면 

내가 쓰고싶은 이야기들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안달인지 알 수 있겠지.



어제 새벽 내린 비로 오늘 공기가 마치 시골공기처럼 맑고 신선하다.

어제는 자기 전 베란다 난간을 밟고 서서 비오는 놀이터와 나무들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물에 씻겨가는 서울공기는 달콤했고, 비냄새는 고요하게 예전 기억을 떠올리게 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걸핏하면 혼자서 옥상에 올라가는 여학생이었다.

우리집은 4층짜리 낡은 작은 빌라 1층이었는데 주변에 높은건물이 없고 산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맑은 날에 저녁먹고나서 옥상에 올라가면 꽤 많은 별들을 볼 수 있었다.

두꺼운 파카를 입고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던 그때,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때가 문득문득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내가 세상의 일부라는것을 알지만 그때의 나는 세계에 구석에 따로 떨어져

부모나 친구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외톨이라고 느꼈었다.


옥상에 올라와 별을 보며 남몰래 짝사랑하는 남자애 생각을 하는 시간만이 평화로웠다.

그리고 스무살이 되던 어느 날, 새 핸드폰을 들고 옥상에 올라갔다가 그만 갇히는 일이 발생했다.

나중에 안거지만 3층 아주머니가 옥상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안에서 잠궈버렸던 것.

나는 당황했지만 집으로 전화하지 않고 한동네에 살던 그 남자애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때마침 지나가는 길이었는지 어떤건지, 십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 애가 우리집 빌라 계단을 올라와서

문을 따서 갇힌 나를 데리고 내려와 주었다.


외로운 나를 구해준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너.

나를 궁금해 해주고 다정히 안아주고 있는 그대로 좋아해줄 너.

나는 그런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고 인생이 꽃이 피듯 환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애도 그렇게 황폐하고 외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일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우리는 너무 어렸고, 알아달라고 안아달라고 끊임없이 서로에게 투정을 부리고 불평했다.

서로 생각했었던 모습이 본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워 어쩔줄을 몰랐었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특히 나는 더 그랬다- 서로를 탓하다가

결국 헤어졌고 그렇게 자신을 온전히 쏟아붓지 못했던 첫사랑은 나에게 커다란 흉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흉터는 10년이 넘어도 건드리면 아플만큼 아물지를 못했었다.







3년전 꼭 이맘 때, 나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에 있었다.

아주 오래 만났던 애인과 헤어져 핑계김에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스페인 도보여행을 감행했었다.

세벽 세 시.

나는 엄청난 소음속에 누워 있었다.

방안에는 침대가 넷. 

나를 제외하면 스페인 아저씨 세명이 자고 있었는데, 세 분은 오랜 친구셨고 유쾌하고 좋은 분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 두 분이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코를 골고 주무셨다.

코를 전혀 골지 않는 호리호리한 아저씨가 내게 미안한 듯, 

중간중간 친구들이 잠들어있는 윗침대를 쿡쿡 찌르고 옆침대를 발로 툭툭 치고 계셨다.

그러고 나면 짧게는 5분, 길게는 10분쯤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곤 곧 다시 코를 코는데, 둘이 내는 소리가 다르면서도 일정한 리듬을 이루어 정말 기이하게 들렸다.

마치 고장난 기계실안에 앉아있는것만 같아 견디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 때, 뜬금없이 그 남자애를 떠올렸다.

한달 전 헤어진 애인이 아닌 내 첫사랑 남자애를.

열아홉살인 나에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평화를 주던 그 남자애를.

그 남자애와 주고 받았던 수천통의 문자 메세지들을.


휴대폰을 꺼내어 그 애에게 카톡 메세지를 보냈다.

나는 지금 스페인에 있다고, 이 말은 꼭 해야할것 같아서 하는거라고.

실은 너를 아주 많이 좋아했었다고. 미안했다고.

상대방은 어리둥절한 대답을 했고 우리는 애매한 인사와 짧은 안부를 물었다.

아저씨들은 여전히 코를 골고 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몸을 일으켜 짐을 싸서, 조용히 그 방을 나왔다.

그 날은 그 마을에서 내가 가장 일찍 길을 나선 날이었다.

올려다본 밤하늘에서는 서울에서 내가 올려다본 하늘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사실은 나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외로운 여자아이가 또 다른 외로운 남자아이를 만나 수많은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고

누구보다도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를.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런 이야기를 진심으로 쓸 수가 없다. 

그 이야기들은 중요한 부분이 비어있다.


적어도 이제는 남이 내 인생을 구해주거나, 남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나를 채워나가려고 노력중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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