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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조 Dec 08. 2022

자기 방어 기제

22.11.09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으면 그 새로운 일을 달성하는 모습을 원하는 나와 목표를 성취하기까지의 과정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내가 싸운다. 목표만을 원하는 나와 과정을 거부하는 나. 목표에 욕심내는 나와 노력하고 싶지 않은 나. 어떤 내가 주도권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 어떤 변화를 추구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 멈춰있기도 하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걱정만을 반복하고 막상 실행은 하지 않는, 제자리에 멈춰있는 시기가 있었다.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하긴 하지만 사실 건설적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책이라던지 나는 왜 이럴까에 대한 자기혐오의 과정이 있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부수게 된 것 하나가 특별한 나를 감싸고 있는 자기 방어 기제이다.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근본적인 자기 방어 기제를 AT필드라고 부른다. AT필드는 작중 가장 강력한 방어막으로 설정되어있다. 얼마나 강력하냐면 지상 최고의 폭발력을 가진 핵폭탄을 수 없이 때려 부어도 상처하나 낼 수 없을 정도의 견고한 무언가로 묘사된다. 


우리의 자기 방어 기제를 생각해보면 죽음에 이르는 큰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타격을 주기 힘들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코로나19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백신 반대론자들이 백신을 맞지 않고 단체 행동을 하다가 코로나에 걸려 죽었다는 기사를 숱하게 보았을 것이다. 현장에서 그들을 지켜본 의료진의 증언에 따르면 코로나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도 이럴 리가 없다며 본인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죽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자기 방어 기제이며, 자기 합리화인 것이다.


이 자기 방어 기제를 부수기 위해서는 원초적인 자신의 맨얼굴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맨얼굴을 마주하기는 힘들다. 외부에서 오는 자극 혹은 본인의 끝없는 욕심과 실력의 간극에서 오는 좌절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가면을 벗은 맨얼굴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가면을 벗은 맨얼굴과 마주하더라도 맨얼굴을 외면해버리기 일쑤다. 내가 상상하던, 주위로부터 기대받는 내 얼굴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애써 모른 척 해 버린다. 문제는 의식 수준에서 모른 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스스로 판단 내리고 방어막을 쳐 버린다. 저건 내가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이 있는 사람은 날것 그대로의 본인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바가 있다. 아. 이래서는 안 되는구나. 내 지금의 능력치는 딱 여기까지구나.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겠지만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간담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과정을 수 차례 겪고 나서야 가면 쓴 얼굴이 아닌 진짜 자기의 얼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준비를 계속해 나갈 뿐이다. 이 담금질의 과정을 거치면서 머릿속의 이상과 욕심을 서서히 내려놓게 된다. 내 실력에 기반한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가 축소되는 과정인 것이다. 


현실과의 괴리가 축소되어 본인의 그릇을 파악하게 될 즈음이면 좌절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게 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어린아이가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탔을 때 한달음에 달려와 자랑하듯이, 생전 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가 의기양양하게 부모의 눈을 쳐다보듯이, 그 시기를 겪어온 누군가가 봤을 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들도 그 과정을 겪어온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성취이고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경험인 것이다.


우리의 욕심이 눈을 가리고 있을 때는 내가 걸음마부터 시작해야 하는 아기인지, 아직 두 발 자전거조차 제대로 타지 못하는 어린아이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욕심 같아서는 당장 로켓을 타고 우주 정복을 나서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좌절하고 깨지고 분노를 삼킨다. 내 현실을 바로 보고 인정하게 되면 삶을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과정이 찬란한 성취이고 경이로운 발전임을 깨닫게 된다. 


욕심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성취감도, 해냈다는 자신감도 느끼지 못한다. 눈높이가 이미 현실을 아득히 초월해서 높아져 버렸기에 내 실력과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취도 그저 그런, 당연히 얻어야 하는 결과로 받아들여버린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한 달에 1000만 원이 기준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연봉 1억을 받아도 성에 차지 않는다. 1억이라고 해 봤자 한 달에 700만 원 조금 안 되는 돈이 들어올 뿐이기에 이 사람에게는 그저 그런 돈에 불과하다. 월 1000만 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단위의 벌이에서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그 크기가 늘어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1000만 원의 과정에는 200만 원도 있고 500만 원도 있지만 그 과정을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곧 1000만 원을 채우지 못하는 한 얼마를 벌든 불행해진다.


과정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부족한 부분을 마주하며 약점을 보완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1000만 원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걸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누구나 기어 다니는 시절이 존재한다. 그리고 기어 다니기를 일 년여 반복해야 비로소 세상을 향한 첫걸음을 뗀다. 


자기 방어 기제 따위는 버려버리고 거울을 보자. 스스로의 얼굴을 마주하면서부터 모든것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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