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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조 Nov 19. 2022

체제의 억압과 자기 계발의 모순

22.11.19

누구보다도 자유를 사랑하지만 자유롭게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본인의 표현과 행동에 대해서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장하지만 정작 주어진 자유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자유를 현재의 체제를 긍정하고 그 체제의 지속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 건 어떤 것일까?


한번 형성된 체제는 계속해서 되먹임 고리를 형성한다. 되먹임 고리는 체제를 점차 견고하게 유지시킨다. 이 되먹임 고리는 체제의 공고화를 위한 억압의 고리다. 억압의 주체는 체제이며, 그 대상은 체제를 소유하거나 직 간접적인 이득을 보는 소수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개인이다. 


체제에 대한 수탈이 가속화되면 가속화될수록 개인의 삶은 피폐해진다. 인류 역사는 수탈과 그 수탈에 참다 참다못해 폭발한 일반 사람들의 투쟁의 반복이었다. 구석기시대 수렵채집 시기에서 농경사회로 넘어가면서 무산자와 유산자의 계급이 생겨났다. 나눠진 계급을 기반으로 체제는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구별됐다. 그 이후는 피지배층이 어디까지 수탈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거대한 사회 실험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실험의 강도가 지나친 끝에 체제가 뒤집어지고 새로운 체제가 기존의 체제를 대체하는 역사가 이어졌다.


물론 체제가 뒤집어지더라도 피지배층이 원하는 세계가 짠 하고 나타나는 법은 없었다. 또 다른 체제가 억압의 되먹임 고리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산업혁명 시기 런던 노동자들은 하루 잠자는 공간조차 구하기 쉽지 않았다. 바닥에 몸을 누이는 것조차 사치였다. 많은 수의 노동자가 밧줄에 매달려 선잠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물론 밧줄에 매달려 있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했다. 작은 굴뚝을 청소하기 위해 5살 배기 아이들을 굴뚝 청소부로 내몰았다. 많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한참 전에 생을 마감했다.


체제는 억압의 되먹임 고리를 끊임없이 가동하고 싶어 한다. 그에 맞선 피지배층의 끊임없는 투쟁과 희생으로 인류는 발전을 이루었다. 그 끝에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도입했다. 많은 나라에서 이 제도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민주주의가 도입되며 인류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 다수의 사람들이 체제에 순응하기를 원한다.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과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더욱더 공고히 하게끔 정치의 큰 방향을 돌려놓았다. 


그들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들의 인생 목표는 대체로 소박하다. 인류의 발전이라든가 다 같이 잘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 한 몸 건사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넓어야 내 가족까지가 생각이 미치는 범위다. 가족밖에 위치한 타인의 아픔과 희생에 공감하지 못한다. 이런 공감 결여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부정,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조롱,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 부여로 나타난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체제의 유지와 그 존속이다. 그래야만 내가, 내 가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체제의 어떤 행위에 있어서도 합리화가 가능하고, 체제가 져야 할 어떤 책임도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해 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신봉하는 기득권이 형성한 체제조차 기존의 체제를 유지해 온 게 아니다. 해방 이후 군대와 경찰을 앞세워 독재를 하거나 기존 체제를 전복시킨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해서는 끝없는 합리화와 정당화가 이어진다. 그들이 만든 체제에 맞서거나 억압을 완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생각 없는 좀비로 묘사하거나, 우리나라를 공산화하려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 정도로 인식한다.


현 체제에 순응하기로 결정한 그들의 선택 이유는 무엇일까? 체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이 불가피하게 따라온다. 거대한 체제 앞에 한 사람의 개인은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체제를 장악한 기득권을 동경한다. 힘으로 형성된 체제는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률을 내세운다. 얼핏 정당해 보이는 법률에 기반한 통치에 거부감 없이 체제 그 자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본인의 정체성을 체제의 정체성과 동일시한다. 자아를 체제 그 자체에 동기화하는 것이다. 체제가 흔들리면 내 자아가 흔들린다. 이제 체제의 전복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런 끝에 나오는 것이 자기 계발이라는 촌극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지금, 타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내 자유를 체제가 만든 착한 아이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는 것에 쏟아붓는다. 착한 아이 콘테스트에서 입상하기 위해서는 소위 스펙 쌓기로 불리는 행위가 전제된다. 먼저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 있는 4년제 대학 진학을 위한 암기 공부. 여러 기업에서 두루두루 써먹을 수 있는 무난한 전공선택. 사회에의 순응력과 적응력을 보여주는 공모전 입상/참가 이력 혹은 인턴 경력. 설사 그 쓸모가 불분명하더라도 시키는 건 어떻게든 만들어 올 수 있다는 성실성을 보여주는 공인 영어 성적과 자격증 취득.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든, 과정에 의미가 있든 없든 관계없다. 일단 내가 잘 되면 나와 내 가족은 건사할 수 있게 될 거니까 그거면 됐다고 생각한다. 뒤처지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내가 뒤처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레이스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나만 아니면 된다. 


그렇게 스펙을 쌓고 그 스펙을 기반으로 착한 아이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끝에 주어지는 보상은? 체제에서 인정해주는 그럴듯한 일자리다. 콘테스트에 입상한 부상으로 주어진 상이지만 생각만큼 좋지는 않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그들이 바라지 마지않은 체제의 존속이 공고해지면 공고해질수록 수탈의 강도는 강해지고, 비 기득권의 삶은 어려워진다.


체제에 순응하기로 한 사람들은 본인의 삶이 어려워지고 사회가 팍팍해지더라도 그 자체를 긍정해버린다. 원래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합리화한다. 경제가 어렵고 외교가 박살 나고 이윽고 개인의 생존에까지 문제가 생긴다. 그럴수록 각자가 스스로를 더 가열차게 계발하여 더 좁아진 착한 아이 콘테스트의 문을 통과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종국에는 대다수가 콘테스트에서 입상하지 못하고 도태되는데, 이렇게 돼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이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다 같이 죽자는 공멸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공멸의 길이, 지금, 활짝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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