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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조 Feb 14. 2021

인터넷만 뒤적거리다가 사라진 주말에 대하여

2/14



새해 계획은 아니지만, 2월부터 30분 단위로 뭘 하고 지냈는지 적고 있다. 처음에는 일정을 적기 위한 예쁜 다이어리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홍대 상상마당에도 가보고 가까운 역 근처 아트박스도 들렸다. 마음에 드는 레이아웃에 적당한 가격대와 크기를 지닌 녀석을 몇 개 눈에 넣어 두었다. 그러나 사지는 않았다. 사기 전에 진짜 저거 쓸 거야?라고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은 "글쎄.." 있으면 쓰긴 쓰겠지만 과연 쓸까? 


그래서 일단 회사에 들어온 다이어리를 집에 들고 왔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도 적당하고 가죽인지 뭔지 부들부들한 커버 감촉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가져온 다이어리는 처음 방에 놓인 그 위치 그대로 2주째 버티고 있다. 아마 새 다이어리를 샀어도 며칠 지나지 않아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아깝지만 저 녀석의 역할은 나의 고지식한 항상성을 일깨워 주는 것에서 끝났다.


그런 고로 예쁜 다이어리 꾸미기는 물 건너갔다. 대신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칸을 나누어 하루에 뭘 얼마나 하는지를 적고 있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가 늘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뭐 하는지 그냥 적어봐라" 그런데 그동안 한 번도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뭐하러 그런 걸 시키나 싶었다. 엄마가 검사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것만 적으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싫었다. 아마도 그걸 적으면 내가 얼마나 노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을 두려워해서였을까? 지금이라면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라도 했을 텐데 그건 아니다. 그냥 엄마가 뭔가를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 같다. 


이제 십 년이 훌쩍 지나서 어머니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 고작 이 주가 막 지나가고 있을 뿐인데 엄청난 발견을 하고 말았다. 이걸 십 년 전에 했더라면.. 버티고 버티다 엄마가 넌지시 말씀하시기를 세 번 정도 반복했을 때 라도 시작했더라면 아마 내 인생이 바뀌지 않았을까 싶은 발견이다.  


일 하는 날에는 자유시간이 얼마 없어서 얼마나 노는지 티가 별로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연휴 4일을 내내 놀면서 적은 일과를 보니까 내가 시간을 어떻게 까먹고 있는지 드러난다. 


목요일 : 인터넷 8시간

금요일 : 인터넷 12시간

토요일 : 인터넷 6시간 (외출한 날)

일요일 : 인터넷 5시간 (외출한 날)


이 인터넷 시간은 영화 보는 시간, 넷플릭스 드라마 보는 시간, 유튜브 보는 시간, 글 쓰는 시간, 게임하는 시간, 인터넷으로 리서치하는 시간 등을 제외한 순수하게 '내다 버린' 시간이다. 주로 커뮤니티 추천글 정독과 인기글 몰아보기, 유머게시판 베스트글 역주행 등으로 소비된다. 참고로 브런치나 칼럼 읽는 시간도 제외된 시간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터넷 접속이 원활하지 않던 특정 시기를 제외하고서는 (21개월..) R 모 사이트 '많이본 글/힛갤' 게시판과 '유머 BEST' 두 게시판의 거의 모든 글을 읽지 않았을까 싶다. 주말에는 보다 보다 볼 만한 새 글이 없어서 컴퓨터를 잠시 끄고 낮잠을 청한 뒤 일어나기 무섭게 패드를 쥐고 새 글을 확인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생활을 십 년정도 반복해 왔다. 그 결과가 목금토일 4일 연휴 30시간에 걸친 인터넷 여행이다. 그 과정에서 건지는 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최신 유행어라든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meme 이라던지, 조금씩 얻어걸리는 뉴스라던지, 우리나라 국방력 순위라던가 이란에게 지급해야 할 석유 대금이 묶여있다는 사실 그리고 기타 고양이 사진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생각보다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금요일은 무려 12시간이나 그렇게 보냈다. 12시간. 드라마를 봐도 16부작 미니시리즈 삼 분의 이를 관통하는 시간이다. 영화라면 6편. 중간에 밥 먹고 잠자는 시간 2시간 빼도 다섯 편. 어마어마하다. 정말로 어마어마하다.


우리가 주로 하는 불평불만들을 생각해보자. 왜 내 인생은 이런 걸까? 왜 내 계좌 수익률은 마이너스일까? 왜 나는 승진이 안될까? 왜 인간관계가 이렇게나 어려울까? 왜 나는 옷을 못 입을까? 왜 나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왜 나는 부모와 맘에도 없던 주제로 말다툼을 할까? 왜 나는 뚱뚱할까? 왜 나는 돈이 없을까? 왜 나는 집이 없을까? 왜 나는.. 왜 나는.. 왜.. 왜.. 


왜냐고? 그런 질문들에 답해야 할 시간, 답을 찾아야 할 시간에 인터넷이나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삶이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드라마라도 봤다면, 바보상자를 그저 쳐다볼 뿐인 그 수동적인 행위라도 반복했더라면 거기서 배우는 게 또 있을 것인데 그저 인터넷 유머게시판 뒤적거리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어떤 분야에서건 발전이 없이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기 그지없는 결과다. 


그럼에도 자존심은 있어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하고 현실 부정만 반복하기를 십여 년.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살아온 하루하루가 모여 만들어진 결과일진대, 그 단순한 걸 모르고 그저 불평만 하고 있으니 살아온 인생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누군가 주말을 너무 허무하게 보냈다고, 비 생산적으로 보내고 말았다고 징징대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다고. 사람이 언제나 생산적일 수는 없다고. 좀 편안하게 스스로에게 휴식도 주고 늘어지기도 해야 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고. 누군가가 다시 나에게 물어본다면 똑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위로니까.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다. 내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 자위일 뿐이다. 지긋지긋하게 반복해온 자기 합리화. 좀 적당히 해도 되는 그것. 


어쨌든 실체를 알았으니 개선의 여지가 있다. 계속 기록해 나가면서 맘에 들지 않는 시간 소모를 다른 활동으로 치환해 나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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