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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조 Jun 28. 2021

직장생활과 주식투자

주식에 3천만원 꼬라박고 쓰는 글 8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자고 결심하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마음을 다진다는 표현이 조금 어색한데, 사실 마음을 다지기보다는 그저 하루하루를 견뎌내는데 급급했다. 계속되는 야근과 주말 대응으로 심신은 지쳐가고, 그저 지금의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방어기제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도망치기의 귀재인 나는 핀치로 몰린 현실을 타개하고자 퇴사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누구나가, 직장을 다니는 모든 사람이 퇴사 생각을 한 두 번 아니고, 수백만 번은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너와, 내가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돈이다. 월 150받는 백수와 450받는 직장인을 택하라면 450받는 직장인을 택할 사람이 많다. 하지만, 월 300받는 백수와 450받는 백수를 비교하면? 300받는 백수를 선택하는 쪽이 많을 것이다.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에 소일거리 알바만 해도 직장인 생활에 비하면 개이득인 삶이 펼쳐진다. 


어쨌든, 퇴사를 하려면 지금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 필요했다. 사실 지금의 생활이라고 해 봤자 변변치 않지만 어쨌든 이 정도의 눈높이라도 이어나가는 수준의 삶을 살아가려면 현금흐름이 있어야만 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 뜨고 눈 감는 순간까지 심지어 잠자는 순간까지 돈 없이는 단 한순간도 지탱해내기 힘들기에 그렇다. 돈이 있어야 밥도 먹고, 책도 읽고, 친구도 만나고, 잠도 잔다. 그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어떤 '수준'유지에 있어서 절대적인 필요조건이 된다.


지금 타고 있는 열차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매 달 지급되는 바퀴벌레로 만든 양갱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열차 맨 끝 칸에 올라타 바글바글 우글우글 그저 견뎌낼 뿐인 하루를 이어가면서 살아가는 삶이지만 그 안에서 얻는 작은 재화. 그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찬란하게 보였다. 실상 얼마 되지 않는 푼돈이지만 그것 없는 삶은 이제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무언가를 손에 쥐려면 손바닥을 활짝 펴야 함이 당연한 이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욕심이 지금 갖고 있는 모래알 하나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지는 삶은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자존감을 깎아먹었다. 손바닥 위 모래알 하나가 더욱더 찬란하게 보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손에 쥐고 있는 모래알 정도는 다른 데서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주식. 단타에서 해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도 깨지고 또 깨지면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장이 열리는 시간에 나도 참여할 수 있다면, 일하는데 쓰는 시간을 차트 공부에 매진할 수 있다면 나도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나는 무언가에 대한 믿음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오랜만에 찾아온 믿음이라는 껍질에 매달렸다. 믿고 하면 된다고 믿었다. 믿음을 믿고 그 믿음을 다시 믿는 믿음의 순환고리를 만들어서 그 안에 스스로를 뉘었다. 그렇게 믿음으로 내 주변을 감싸고 정작 반드시 필요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노력'은 아주 기초적인 기본 베이스로 깔리는 요소이다. 보통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부분이 바로 노력이기 때문이다. 내 외모, 머리, 성품, 성격, 말투, 사고방식, 가치관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싫다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받은' 것이고, 환경으로 부터 우연히 '얻은' 것이다. 여기서 내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발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눈을 가리고 귀를 멀게 했다. 나는 반드시 주식으로 성공할 거라는 믿음. 차트를 통해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서부터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식 고수가 된 내 모습을 상상했다.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레이딩으로 몇 백, 몇 천을 쉽게 벌면서 소비하는 삶. 그 모습이 곧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그러니 돈을 넣고 잃어도 멘탈에 큰 타격이 없고 그저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게 경험이고 내 피와 살이 되어 나를 주식 고수의 길로 인도해줄 거라고 믿었다. 


너무나도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믿음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못함을 몰랐다. 아마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겠지만 애써 모른 채 했다. 마음의 위안과 안정. 자기 위로를 위한다면 믿음의 효과는 굉장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된다. 최소한 남들 하는 만큼이라도 해야 된다. 뉴턴이 사과나무 밑에 누워있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중력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최소한 사과나무 밑으로 기어들어가려는 노력은 해야 되는 것이다. 자기 안에 처박혀서 믿음의 껍질을 두른 자기 위로를 아무리 반복해 봐야 바뀌는 건 없다. 상황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악화될 뿐이고 그에 비례해 내가 두른 자기 위로의 껍질은 단단해진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 껍질에 완전히 먹혀버리게 되거나 위화감을 버텨내지 못하고 껍질을 깨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안쪽에서 껍질을 깨기란 정말 어렵다. 새로운 생명의 창조처럼, 하나의 세계, 광활한 우주의 탄생과도 견줄만한 변화의 순간 껍질은 깨진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말이다. 안에서 깨고 나오기 힘들면 바깥의 도움을 받아도 된다. 어쨌든 두꺼운 껍질에 쌓여있는 삶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 이 껍질을 어미닭이 깨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꼭 어미닭이 아니더라도 깨고 나오기만 하면 어쨌든 세계는 열린다. 비록 그 세계가 뒤틀린 차원일지라도.  


내 세계는, 폭풍우 치는 바람에 휩쓸려 저 우물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면서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


2020년 3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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