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실 건조기를 돌리면 예상시간이 1시간 55분이 찍힌다. 그런데 막상 보면 1시간 55분 전에 끝난다. 정확한 시점을 알고 있지는 못한다. 체감상 대략 1시간 30분 정도 지나고 가면 끝나 있다. 수년간 체득한 기대치로 이제는 거의 틀림없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세탁실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세탁실에 갔더니 5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5분이면 다시 방에 들어가서 할 거 좀 더 하고 나와도 되는 시간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그냥 들어가기가 싫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건조기 앞에 서서 통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옆에서 힘차게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도 들렸다. 건조기에 찍힌 시간은 아직도 5분대.
1시간 55분의 최초 건조시간에서 대략 30분 정도가 빠지고 1시간 30분. 실제로 빨래 건조를 기다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이다. 그중에서 남은 시간이 5분이다. 이미 1시간 25분의 기다림은 지나갔고, 마지막 5분이 남은 것이다.
5분밖에 안 남았는데, 그냥 뚜껑을 열까? 열어보고 아직 다 안 말랐으면 다시 돌릴까? 그러다가 열기가 빠져나가서 5분을 돌렸음에도 다시 건조를 시작해야 되는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을까? 5분 동안 뭐 하고 있지? 이런저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세탁실에 오기 전에는 분명 건조가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심심함을 달래줄 핸드폰도 가져오지 않았다.
5분이라는 시간을 남겨놓은 지금. 선택지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1. 마지막 5분을 기다린다. (100% 건조됨)
2. 마지막 5분을 기다리지 않고 뚜껑을 연다.
2-1. 건조가 다 됐다.
2-2. 건조가 다 되지 않았다.
2-2-1. 다시 돌린다. 대신 한 번 열기가 빠졌으므로 얼마나 더 돌려야 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2-2-2. 그냥 조금 덜 말린 채로 가져간다.
마지막 5분을 기다리면, 100% 확률로 건조된 빨래를 안고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기다리지 않는다면 확률의 세계로 들어간다. 5분이 모자라지만 건조가 다 됐을 확률과 5분에 불과하지만 건조가 다 되지 않았을 확률을 마주한다. 건조가 다 됐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았을 경우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남은 시간만큼 건조기를 마저 돌린다 한들 한 번 열기가 빠져버린 건조기는 이미 힘차게 돌아가던 건조기와는 상황이 다르다.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5분을 기다리면 됐지만 이제는 10분, 15분을 더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건조기를 눈앞에 둔 내 상황이, 지금의 주식시장에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7개월 넘도록 하락장이 지속되고 있다. 나스닥 기준 고점에서부터 30%가 하락했고, S&P는 20%가량이 떨어졌다. 보유한 국내 주식 계좌도 이례적으로 평가손실이 -20%대 근처로 접어들었다.
어떤 뉴스를 보고, 어떤 유튜브를 보고, 어떤 리포트를 봐도 긍정적인 시각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러시아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경제도 침체가 확정적이며 중국에서는 코로나가 다시 확진되어 재 봉쇄 이야기가 나오고 여기에 더해 원숭이 두창의 확산도 뒤를 잇는다. 달러 역시 몇십 년 만의 초 강세를 보여주지만 여기에 맞서 러시아와 중국을 필두로 한 새로운 통화 바스켓 시스템을 만들어 미국에 대항한다는 이야기,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한 가능성,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주담대 금리를 옥죄고 기준금리 인상을 억누르며 외환보유고를 털어 언 발에 오줌누기와도 같은 환율방어에 나선 정부까지.
끝도 없이 부정적인 시황과 뉴스, 그리고 여러 당국자의 발언들이 쉴 새 없이 들리는 요즘이다. 지금도 많이 떨어졌지만 여기서라도 던져야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나고 나서 보면 그렇게 쌀 때 더 샀어야지 뭐 하고 있었냐고 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때라도 던졌어야지 왜 바보 같이 손절을 못했냐고 나무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방향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건조기는 5분 남았다. 인류가 망하지 않는 이상 주식시장은 반드시 회복하기 마련이다. 즉, 5분을 기다리면 반드시 계좌는 회복된다. 하락기에 주워 담은 만큼 회복기에는 수익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서 손절을 하고 다시 타이밍을 본다면? 건조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확신 없는 확률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때그때 대응해야 된다고? 대응이 되는 실력이었으면 나스닥이 30% 빠질 때까지 비중을 꽉꽉 채워서 들고 오지도 않았다.
지금 내가 해야 될 일은, 5분 남은 건조기가 건조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건조기 뚜껑을 연다 거나 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1시간 25분을 잘 버텨왔는데, 마지막 5분을 못 버티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다. 이제 와서 모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건조기에 찍힌 5분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5분이 5분이 아니라 50분으로, 5시간으로 느껴진다. 시간 그 자체에 매몰되어버리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이럴 땐 다른 활동을 하며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나는 5분 남은 건조기 앞에서 평소 부족했던 스트레칭을 했다. 스트레칭을 하며 몸의 이야기를 들었다. 5분이라는 시간동안 취할 수 있는 동작도 많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예기치 않게 주어진 5분동안 평소 하지 못했던 나와의 대화를 나눴다. 어쩌면 지금은 잘 버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기회를 준비할 시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