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진행하다 보면 정말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가 터진다. 문제가 불거지고 나면 왜 그걸 몰랐지? 생각이 드는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사진으로도 찍어서 검토했지만 실제로 그 부분이 문제가 될 거라고 미리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해당 문제에 대한 대비를 미리 했어야 되는 게 아닌가.라고 지나고 나서 분개한다. 그리고 그 분개의 화살은 미리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어리석은 나에게로 향하지 않는다. 당연하다듯이 내가 그래도 되는, 내가 화를 내도 괜찮아 보이는, 상대에게 향한다.
문제가 생기기 전 까지는 본인도 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음에도, 일이 터지고 나면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한다. 나는 상대에게 화를 내고, 상대는 나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입장이기에 말을 아낀다. 한 순간에 입장을 쏙 바꿔서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나에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잘났으면 지가 미리 챙기던가.
그렇다.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꼭 지나고 나서 상대방에게 뒤집어 씌우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그 상대방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내가 인지하지 못할 뿐 나의 모습이 가해자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나는 가해자가 아닌데요?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판단하는 것 내가 당하는 것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네가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어떤 상황에 닥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련 한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에 따라 계속해서 합리화를 지속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여기서 지능이 높은 사람은 대처가 조금 다르다. 일처리가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은 부분에서 화가 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부분에 대해서 더 찾아보지 않았고 더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본질적인 문제임을 자각한다. 상대방이 알아서 잘하기를 바라는 건 정말 유치한 생각이고 내가 챙기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하지 않을 거라는 당연한 귀결을 받아들인다.
위의 예시에서처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경우는 남 탓을 밥먹듯이 하면서 '완벽한 나'에 대한 환상을 끝없이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잘못을 했던지 상관없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어떤 맥락을 가져다 대서라도 어떻게든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다. 누가 그런 속 보이는 짓을 할까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그런 사람들이 주식 투자의 세계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투자에 있어서는 남 탓을 하기가 조금 힘들다. 직접투자의 경우 어디까지나 내 손가락으로 매수 버튼을 누르고 매도 버튼을 누르기에 그렇다. 매수와 매도를 결정짓는 마지막 선택과 실행은 나 스스로 행한다. 그렇다면 내 판단에 의해서 망가진 계좌를 마주하고 나면, 이제는 과연 본인의 실수를 반성하고 '완벽한 나' 가면을 내동댕이치고 맨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기는 더 어렵다.
어디까지나 내가 결정하고 내가 오롯이 책임지는 투자의 세계지만 여기서도 남 탓을 이어 나간다. 사회에서처럼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투자 세계에서의 남 탓은 본인의 공부 부족 그리고 본인의 공부 방향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아닌, 더 나은 어느 누군가의 기법을 찾아 나서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예를 들어서 상한가 따라잡기를 하다가 깡통을 찬 A가 있다. 이 사람은 전 재산을 몇 주 만에 홀라당 날려먹는다. 깡통을 차고 나서 땅을 치고 후회하지만 어디 가서 쪽팔려서 말도 못 하고 가슴앓이를 몇 달간 지속한다. 하지만 모든 아픔에는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멘탈이 회복되어버린 A는 다시 주식시장으로 돌아온다. '내가 깡통을 찬 이유는 X에게서 상한가 따라잡기를 배운 것 때문이다. X의 방법은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으니 Y가 제시한 상한가 따라잡기 기법을 연습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당연하게도, Y의 상한가 따라잡기 기법을 아무리 연습해도 A는 깡통을 찬다. 다시 땅을 치고 후회하고, 머지않아 멘탈이 회복되며 계좌에는 노동 소득이 차오른다. 다시 Y를 버리고 Z로 간다. Z의 기법은 맞을까? 또 깡통을 찬다. 이번에는 상한가 따라잡기는 본인의 체질이 아닌 것을 인정한다. 이제 상한가 따라잡기는 됐고 하루 10% 급등하는 종목을 귀신같이 찾아낸다는 X'의 카톡방을 기웃거린다. 상한가 따라잡기에서 하루 10% 상승 종목으로 욕심의 눈을 한껏 낮춘 나를 칭찬하며 그의 기법을 배운다.
본질에 대한 고찰, 잘못된 판단의 주체인 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없이 또 다른 사람의 기법을 찾아다니고 또 다른 어떤 종목에 목숨을 건다. 기법이 중요한 게 아니고 종목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에 매몰되면 실력이 절대 늘 수 없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대치동의 어떤 선생이 수학을 잘 가르친다더라. 가서 수업을 백날 들어도 어떤 태도로 수업을 듣는지, 수업 듣기 전/후 예습과 복습을 얼마나 하는지, 수업을 듣기 전에 갖춰진 기본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수업의 효과는 천지차이로 나뉜다. 좋은 선생에게 수업 들어서 좋은 성적이 나온다면 지금처럼 1타 강사의 수업을 손쉽고 저렴한 비용으로 소비할 수 있는 시대에 공부 못 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어야 한다.
같은 선생에게 수업을 들어도 누구는 100점을 맞고 누구는 10점을 맞는다. 80점, 90점 맞는 누군가에게는 나에게 꼭 맞고, 실력이 출중한 선생을 찾아다니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그들은 80점을 100점으로, 100점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레벨업 할 수 있는 자질이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10점 맞는 꼴찌에게 정말 필요한 건 기초 실력 다지기다.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한 이해, 나의 수준에 대한 분석, 내가 해야 되는 것에 대한 계획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과 들어오지 않는 사람 간의 차이는 끝도 없이 벌어진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찾으려는 자기 방어적 행동을 인지하고, 그것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묘연한 일이 되어버린다.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현상유지조차 버거운 현실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