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에게는 정말 이상한 남사친이 한 명 있다.
대학에서 만난 말레이시아 친구인데, 키는 170정도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직모머리와 네모난 안경을 낀 패알못 공대남이다.
내가 2015년 미국 대학에 입학했을 땐 K-드라마와 K-POP, 그리고 런닝맨의 영향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친구들 사이에서 한국인들이 낙수효과(?)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 때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모든 이들이 우리를 김수현의 형제자매, 공유의 사촌, BTS의 동창 정도로 취급해주었을 정도랄까?
그 남자애 이름은 어니스트인데, 얘도 내가 한국인임을 알자마자 꽃을 든 남자의 OST 가사를 해석해달라느니, 자기와 런닝맨 놀이를 개최하자느니, 한식을 해달라는 둥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서로 기숙사가 가깝고 1학년이라 뭘 잘 몰랐던 나는 런닝맨 게임 개최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구를 별 의심없이 들어주다, 어느날 모든 친구들이 우리 둘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철벽을 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른 여자애에게 고백했다며 조언을 구했다. 그때만큼 진심으로 연애 조언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남사친이 생겼다. 그렇게 학부시절이 흘렀고 우리는 졸업을 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국제학생들 대부분은 다시는 못 볼 사이가 된다. 나는 그렇게 한국으로, 어니스트는 말레이시아로 돌아갔고 나는 아주 쉽게 그를 잊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집으로 말레이시아발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어니스트였다. 놀랍게도 그는 이후에도 꾸준히 엽서를 한번씩 보내왔다. 부모님의 의심은 증폭되었다. “얘가 너 좋아하니?” 하지만 그 엽서의 내용은 죄다 자신 얘기 뿐이다. 어느날은 자신의 조카 얘기, 다른날은 자신의 상사 얘기만 써서 보낸다. 황당하게도 내 안부를 묻는 것도 생략된 적도 있다.
어제 또 엽서가 도착했다. 나는 이번엔 본인의 승진 얘기 밖에 없는 엽서를 읽으며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는 이제야 그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어니스트는 그냥 정이 많고 순수한 남자사람이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