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진 않아도 행복해
지난주 무작정 연차를 냈다.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기도 했고, 늘 똑같은 출퇴근길 풍경에 환멸을 느껴 아무런 계획 없이 일단 연차 서류부터 올렸다
사실 연차를 결심한 그 순간만큼은 '이번에는 여행도 가고, 알차게 보내야지'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침대에서 꾸물거리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일단 일찍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에 오전 9시 30분 알람을 맞춰놨으나, 역시나 11시쯤 느지막이 일어났다. 그러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를 수십 번 반복하다 '연차 뭐 별거 있나' 하는 마음에 그간 회사에 치여 못 누렸던 일상을 즐기기로 했다.
병원 가기
난 감기가 이렇게 독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코맹맹이 소리가 난 지 2주가 넘었는데도 낫질 않았다. 또 잦은 기침으로 이제는 기침을 할 때마다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사실 감기는 그냥 시간 지나면 낫는 질병으로 생각해 방치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감기는 그저 그런 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 첫 행선지는 병원으로 정했다. 우리 동네 내과는 어르신들 사이에서 나름 입소문 난 곳이라 대기 시간만 1시간쯤 걸린다. 날이 어둑어둑해진 퇴근길에는 병원을 가도 허탕 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역시 연차인 오늘은 병원도 여유로웠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 맞춰 가자 운 좋게도 바로 내 이름이 불렸다. '역시 연차가 최고군'하는 생각과 함께 진료를 받았다.
참고로 하도 낫질 않아 코로나나 독감을 의심했는데, 다행히(?) 비염과 몸살이 함께 온 거라고 한다. 푹 쉬면 낫는다고 하니, 오늘 연차 쓰길 잘했다 싶었다.
카페에서 책 읽기
두 번째 행선지는 카페다. 물론 집순이는 집 밖을 멀리 나가지 않기에 집 주변 카페로 정했다. 평소 가보고 싶었는데, 좌석이 많지 않아 혼자 가기는 엄두가 안 났던 곳을 마침내 오늘 갔다. 아메리카노 한잔에 내가 좋아하는 재즈풍 음악까지 들리니 금상첨화였다.
카페를 자주 가는 편이긴 하다만, 주로 할 일이 있을 때만 가는 편이다. 예를 들어 밀린 업무를 해야 하거나 이력서 등을 쓸 때 말이다. 오늘처럼 할 일이 없는데 가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카페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책 한 권을 챙겼다. 얼마 전 김유담 작가의 소설 <커튼콜은 사양합니다>를 읽고, 책 읽는 즐거움에 다시금 빠졌다. K-직장인의 비애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책인데, 이 책을 읽을 당시 시간적 여유가 없어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읽었다.
오늘은 시간도 여유롭겠다, 원래 읽고 싶었던 책인 최인철 저자의 <프레임>을 읽었다. 책 속 좋은 구절이 꽤 많았는데 지금 당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모든 출구는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다'라는 문장이다. 퇴사를 고민하는 시기에 내게 작은 용기를 불어준 문구다.
또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은 실패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 또한 내게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실패 가능성에 먼저 주목해 안정적인 방향으로 가려는 습성이 있다. 20대는 부딪혀도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이라고들 하지 않나. 실패 가능성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운 기준에 맞게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코인 노래방
내가 스트레스받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코인 노래방이다. 원래는 1000원에 4곡 하던 곳이 1000원에 3곡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1000원으로 할 수 있는 사치 중 가장 큰 사치다. 내게 붕어빵 3마리보다 더욱 값진 게 코인 노래방 3곡이다.
노래방에 가면 부르는 노래는 거의 똑같다. 체리필터, BMK, 버즈 등 옛날 노래 듣기를 좋아하는 고리타분한 성정 때문에 2000년대 노래만 부른다. 그 와중에 옆 부스에서 아이돌 노래가 들려오면 새삼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체리필터는 포기할 수 없지.
필라테스
마지막 일정은 운동이다. 사무실에서 항상 고개를 쭉 뺀 채로 노트북을 보다 보니 거북목에다 라운드 숄더까지 가진 무지막지한 체형이 됐다. 또 원래도 골반 비대칭이 심했는데, 양반다리를 하도 하다 보니 비대칭의 정도가 더 심해져 필라테스를 다니게 됐다.
운동이란 게 참 그렇다. 할 때는 너무 힘들고, 내가 내 돈 주면서 이런 고통을 왜 감수해야 하냐고 속으로 온갖 나쁜 생각을 해도 끝나고 나면 무엇보다 성취감이 크다. 이런 성취감 때문에 필라테스를 끊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운동 후에는 먹고 싶었던 연어롤을 시켜먹었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그간 연어롤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드디어 먹었다. 역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지나 보다. 이만하면 오늘 하루도 알차게 보낸 듯하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