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여름과 영하의 이르쿠츠크

블루라군에서 생긴 일

by 강양

혼자서 자는 밤이 이렇게 고요할 줄이야. 커튼을 치기 전까지 해가 뜬줄도 모르고 오랜만에 달콤한 늦잠을 잤다. 다리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이불을 헤치고 테라스로 나갔다. 미지근한 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아침 수영을 하느라 분주했고 저편에서 달그락 식기 부딫히는 소리와 낮은 말소리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조식이 10시까지 였던가?' 체크인 때 받은 안내 종이를 찾다가 룸 키를 들고 나갔다. 건물 아래로 내려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 직원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메르하바 merhaba! 중앙엔 뷔페식으로 음식들이 쌓여 있었고 여러 국적의 투숙객들이 자기들만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수영장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로 햇빛이 들어와 하얀 테이블보 위에 부딫혔다. 나는 접시에 메론과 오믈렛을 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커피를 가져와 빈 테이블에 앉았다. 얼마만의 호텔 조식이지? 늦잠을 잔 탓에 대부분의 음식들이 빠져 있었지만 이걸로도 좋았다. 바게트에 잼과 버터를 발라 몽글몽글한 오믈렛을 곁들여 먹었다. 주스로 목을 축이고 수영장 쪽을 바라봤다.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윽고 첨벙하는 소리. 조식을 먹으러 올 사람이 더이상 없는지 직원들은 음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음식과 식기가 놓여져 있던 곳이 휑해지니 나도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시간되면 저녁 먹으러 와!


욜루 해변에서 만났던 아벧이었다. 해변 가장자리에서 캠핑을 하던 터키 친구였는데 보트 투어를 하던 날 번호를 준 적이 있었다. 아벧은 또 플로르와 페드릭이라는 친구들을 소개 해주었고 다같이 저녁을 먹었었다. 외국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니까 대체로 호의적이었는데 아벧은 어딘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매일 같이 연락해 스케줄을 물었고 자기 텐트로 놀러오라고 했다. 숙소 근처인데 잠시 나올 수 있겠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그가 내 숙소를 알게 된 건 플로르와 페드릭, 아벧과 다같이 갔던 마트가 숙소 맞은편이었기 때문이었다.


-플로르도 아직 있어?

-내일 떠난대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건 아니었고 조금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래서 늘 플로르와 페드릭이 있을 때만 캠핑장에 놀러갔다. 그런데 그들이 내일 떠난다니. 함께 한 시간은 짧았지만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저녁에 보자고 답장을 남겼다. 플로르와 페드릭은 연인사이였다. 플로르는 스위스 사람이었고 페드릭은 콜롬비아 사람이었다. 대륙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니. 그들의 어떻게 만나 연인이 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도 상관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들의 여행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그들은 지금쯤 어디를 여행하고 있을까?



방으로 들어가 수영복 위에 민소매 원피스를 걸쳤다. 이렇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바다로 뛰어들 수 있었다. 벗었던 원피스로 물기를 닦고 햇빛에 말려 입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기온이 30도 전후이니 젖은 옷은 금세 말랐다. 터키에서는 운 좋게도 비 한 방울 맞지 않았는데 어쩌면 터키는 비가 오지 않는 나라가 아닐까 의심이 되기도 했다. 이런게 바로 지중해 날씨구나.... 오늘은 특별히 욜루 해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사람이 가득한 욜루 메인 해변도 좋지만 근처의 작은 해변들도 많아서 한번씩 가보고 싶었다. 욜루데니즈 메인 비치거리에서 안쪽으로 가면 블루라군이라는 유료 해변이 있다고 했다. 욜루데니즈에는 만을 따라 형성된 작은 해변들이 많다. 꼭 욜루데니즈가 아니더라도 지중해와 만나는 터키의 남부는 해변의 천국이다. 문득 지중해를 공유하고 있는 여러 대륙을 다니고 싶어졌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와 몰타 그리고 이집트. 20분 정도 걸었을까. 식당과 호프집으로 둘러싼 골목을 지나자 호젓한 길이 나왔다. '블루라군 10미터' 라고 쓰여진 이정표 옆에는 요금을 받는 사람이 서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으니 푸르고 투명한, 에메랄드 빛의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 바다의 한 중간에는 무인도처럼 보이는, 나무로 울창한 바위 섬이, 알록달록한 파라솔과 몇 개의 선베드들이 모래사장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 순간 영화 블루라군의 몇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적당히 그늘이 있고 빛이 드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꼭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풍경 하나하나를 담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움직임 하나도 놓치기 싫었다. 나는 선크림을 바르다가 가방을 베고 잠시 누웠다. 따사로운 햇빛이 몸을 감싸는게 느껴졌다.


깜빡 잠에 들었나보다. 차악, 처억하는 바닷물이 돌에 부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부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얼굴과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옆에서는 터키어로 통화를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양 팔에 튜브를 끼고 바다로 아슬아슬 걸어가는 아기들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해가 막 가장 뜨거울 오후 두 시였다. 일어나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투명한 바닷물이 발가락에서부터 조금씩 차올랐다. 정수리는 뜨거웠고 발목 아래는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몸을 숙여 천천히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몸이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할 때 수경을 끼고 얼굴을 푹 넣었다. 바닷속은 의외로 따뜻했다. 팔을 휘저어 앞으로 나갔다. 첨벙거릴 때마다 하얀 포말이 일었다. 수영을 잘하지는 못하고 겨우 자유형만 배웠지만 물을 좋아해서 두려움은 없었다. 워낙 겁이 없는 성격이기도 했고. 하지만 숨을 오래 참거나 잠수에 능한건 아니어서 자주 숨을 고르러 밖으로 나와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필사적으로 수면 밖으로 고개를 꺼냈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자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산소통을 메고 심해로 들어가는 다이버들처럼. 하지만 난 산소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특수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녔다. 그럼 어떻게 더 깊이 들어간담? 나는 일단 잠수를 시작했다. 코를 부여잡고 어깨를 팔랑 흔들어 앞으로 나갔다. '난 할 수 있어, 조금 더 버틸 수 있어' 이런 말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게 산소가 될리는 없었지만 이전보다 더 숨을 오래 참을 수는 있었다. 조금더 멀리 들어가니 (그렇다고 아주 멀리까지 간 건 아니지만) 신비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바다를 투과한 햇빛이 들어오면서 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조금 큰 물고기들도 많이 보였다. 어떤 부분은 땅이 푹 꺼져 있었다. 검은 세상이다. 파랗고 검은 세상. 그때,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듯이, 암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은 가라 앉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빛 따위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내 숨이.... 숨이 모자라. 그제서야 나는 너무나 멀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땅에 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래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다 깊은 곳에서 나는 무얼하고 있는걸까. 나는 힘껏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팔을 뻗어 열심히 저었다. 물 속에서 속력을 내는 건 거의 불가능했는데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생각하니 어디서 괴력 같은 힘이 솟아났다. 죽어도 한국에서 죽을래. 겨우내 고개를 물 밖으로 꺼냈다. 숨을 푸- 내뱉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어느새 무릎에 돌이 부딫히자 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죽을 뻔 했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죽을 뻔 했다는 걸 알지 못했고,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튜브를 낀 아기가 모래사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물장난 하는 것이 보였다. 나도 아기처럼 앉아보았다.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