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여름과 영하의 이르쿠츠크

꿈의 정원과 기적의 호프브로이 맥주 2

by 강양


뮌헨 대학교 입구에서 영국정원으로 들어가는 초록색 펜스를 지나자 밝았던 사위가 일제히 어두워졌다. 나무 그림자 아래로 작은 천이 흐르고 있었고 타원형의 나무 다리가 놓여있었다. 그 위로 버드나무가 바람에 팔랑였다. 그늘진 곳이라 천이 흐르는 곳은 쌀쌀하기까지 했다. 폭이 짧아 보이지만 깊이는 가늠할 수 없는 그 작은 천은 꽤 빠른 속도로 어딘가로 흘러 내려갔다. 꼭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닿아야 하는 숙명을 지닌 것처럼 말이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와 물가에 닿으면서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고 타원형의 나무 다리와 무지개가 나란히 있어 꼭 무지개 다리 같이 보였다. 쏴- 하고 아래로 쏟아지는 천은 마치 폭포의 일부분 같았다. 버드나무 숲을 지나자 그 뒤로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경사 하나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초록색 들판과 향나무 같이 생긴 동그란 모양의 둥근 나무들이 군데군데 심어져 있었다. 넓은 들판에는 그림자에 몸을 뉘어 쉬는 사람들과 햇빛 아래 몸을 굽는 사람들, 공놀이를 하는 아이와 가족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강아지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꼭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나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태도로 꼼짝 않고 서서 눈을 좌우로 돌렸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다양한 색채에 다양한 질감의 그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발이 묶인 사람처럼 가만히 있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사각형의 휴대폰에 차마 담을 수 없는 이 풍경은 내가 살 수도 가져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고 화가가 스케치를 하는 것처럼 눈앞의 것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나무의 크기, 구름의 높이와 사람들이 앉아 있는 형상과 그 속에 서 있는 나.


입구에서 힘차게 흘렀던 강줄기와는 달리 정원 중앙에는 잔잔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가방 속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오늘 같이 짙은 농도의 자연광이 내리쬐는 날이면 필름 카메라를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눈 감고 찍어도 작품이다' 뷰파인더로 보는 영국 정원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감히 내가 가진 언어로 영국 정원을 묘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숨죽여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런 걸 혼자 보다니....하.' 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는 것으로 아쉬움 내지 약간의 개탄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얇은 담요를 펼쳐두고 거기서 몇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거나 자전거를 옆에 두고 와인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듣고 부르는 모습이었다. 대도심 속에 이런 정원이 있다는 것이 역시나 놀라웠고 뮌헨 사람들이 부럽기만 했다. 어떤 위치에 있으나, 어떤 위치에서 보나 영국 정원은 완벽 그 자체였다. 과연 전혜린이 사랑할 만하네. 나는 가방을 툭 던져 놓고 그 자리에 잔디를 뭉개고 앉았다. 강가 건너 커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아까 입구에서는 정말이지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남성이 맨 몸으로 공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괜히 내가 민망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고 사람들은 그게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거나 상습범이지 않았을까? 아무튼, 여기엔 왜 이렇게 '벗은' 사람들이 많은 거지? 나는 최대한 티 나지 않게 강 건너의 남성을 흘겨보았다. 유럽인들의 햇빛 사랑이란.


한창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어제 양조장을 두 명 예약하고 동행을 구한다는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 뮌헨에 왔으니 제대로 된 맥주는 마셔야 하지 않나 싶어 급히 예약한 것이었다.


-저요.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담백하게 달린 댓글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동행 글을 올리면서 제일 먼저 연락 오는 사람과 맥주를 마시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댓글을 남기든 상관없었다. 무례하고 신경질적인 사람만 아니라면. 나는 곧바로 카카오톡 아이디를 남겼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저는 배낭여행 중인...으로 시작하는 그의 소개글은 앞부분만 읽고 나머지는 읽지 않았다. 괜한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았고 어쨌거나 그 사람과 호프브로이에 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기재한 답장을 보냈다. 물론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한창 휴대폰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아까 그 커플이 보이지 않았다. 커플 옆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도 없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영국정원 어딘가를 지나고 있겠지. 나는 잠깐 몸을 뒤로 기울이고 그대로 털썩 누웠다. 푹신한 잔디의 쿠션감이 좋았고 엉덩이가 조금 축축해지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전혜린도 어느 가을날 이렇게 영국 정원 잔디에 누워 있었을까? 나는 전혜린이 된 듯한 기분에 잠깐이나마 공중에 떠있는 착각에 빠졌다.


약속 장소는 마리엔 광장에서 영국 정원으로 바뀌었다. 내가 공원에 있다고 하자 그가 흔쾌히 온다고 했고 나는 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공원이 워낙 커서 서로가 생각하는 입구가 달랐고 아무튼 몇 번을 헤매다 아까 그 무지개 다리가 있었던 곳에서 나의 맥주 동행(이하 m)을 만나게 되었다. m은 검은색 비니를 쓴 건장한 체구의 학생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난다는 말을 인사로 시작해 잠시 쉬다가 양조장으로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같은 배낭 여행자로서 그간 각자의 여행담을 풀어냈다. m은 건축학과에 다니는 학생이었고 나는 3년 차 직장인이었다. m은 남자였고 나는 여자였으며 여행기간은 내가 더 길었고 앞으로 남은 여행기간은 내가 더 짧았다. m과 나는 영국 정원의 한편에 앉아 끊길 듯 이어지는 대화의 꼬리를 붙잡고 있었고 나는 이러다 양조장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질까 봐 약간의 초조해했고 조금 말을 아꼈다. m도 영국 정원에 대해 몇 마디 했었는데 진짜 크다라는 말을 반복했던 것 같고 하늘이 맑다, 시야가 좋다는 뜻의 어떤 문장을 말했던 것도 같았다. 나는 그 말 중에서 시야가 좋다, 라는 데에 꽂혀서 시야, 시야하고 발음했다. 시야가 좋다는 것은 눈이 미치는 범위가 걸리는 것 없이 탁 트여 있다는 말이겠고, 설령 걸리는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맑고 푸르고 또렷하고 선명한 이미지가 좋다는 말이겠지?


m과 나는 원래 만나기로 했던 마리엔 광장을 지나자 급격하게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이젠 나보고 누나라고 말하는 m은 조금 지쳐 보였는데 아무리 걸어도 양조장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나도 m도 배가 고파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 지친 모습을 보며 걸어야 했다. 길을 가다 뭐 좀 먹을래? 하고 내가 물으면 m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뮌헨 역을 지나 우리는 드디어 양조장에 다다랐다. 양조장 앞에는 안내하는 직원이 예약 여부를 살폈다. 우리 차례가 되자 m은 유창한 독일어로 예약자 이름을 말했고 뒤에서 듣던 나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독일어를 할 줄 알아?

-아...네.

-근데 왜 말 안 했어?


나는 마치 배신감이 든 마음으로 왜 너의 독일어 실력을 말하지 않았냐 추궁했다. 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독일어를 배워왔다고 말했고 그의 눈은 조금 빛나 있었다. 직원이 안내해준 자리는 큰 홀의 뒤편이었다. 파란색 격자무늬로 짜여진 테이블보 위에 가지런히 식기가 놓여 있었다. 메뉴판을 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맥주 하나 씩과 학센을 주문했다. 영국정원에서부터 걷느라 상당히 지쳐 있었는데 맥주를 보자 그 피곤함은 어디 갔는지 사라져 버렸다.


-와


m은 자기 팔뚝만 한 맥주잔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m을 만난 지 1시간이 조금 넘었지만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와- 밖에 모르는 바보들처럼 와,와 하면서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그 노랗고 차갑고 보드라운 거품이 얹힌 맥주를 꿀꺽 꿀꺽 삼켰다. 그때 그 호프브로이 맥주를 삼키는 순간 내 몸 안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났고 혀 끝이 짜릿했고 누군가 정수리에서부터 찬 물을 들이부은 것 같은 시원함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짙어지기 시작한 건 호프브로이 맥주를 세 잔 마셨을 때였다. 다행히 m과 나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둘 다 그리 취하지는 않았는데 두 볼이 뜨겁고 달아오른 느낌은 선명했다. m은 자신이 독일어를 공부하게 된 과정을 말해주었고 그게 곧 독일에 온 이유라고, 그게 마치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듯이 말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랐다고. 기나긴 시간 끝에 발음한 첫 독일어의 느낌을 잊을수가 없다고. 조금 격양된 말투로 힘주어 말했다. m의 모습은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힘 없이 걸어오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어떤 꿈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도태시키기도 하는구나. 나는 m처럼 오랜 시간 품어온 꿈 같은 대상은 없었으나 왠지 알 것도 같았다. 그건 아마 전혜린을 읽으며 영국 정원을 꿈꾸고 슈바빙 거리를 상상했던 지난 날의 내가 아닐까.


-사실 영국정원 있자나. 내가 좋아한 작가가 진짜 사랑한 장소였대


나는 전혜린과 영국정원에 대해 , 내가 영국정원에 갔었던 이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m은 땀을 흘리며 빨개진 얼굴로 들었다. 그리고 응원한다고, 멋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무얼 응원한다는 건지 또 뭐가 멋있다는 건지 잘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오히려 파악되지 않음이 더 좋았다. m과 나는 세 번째 맥주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프브로이에서 나오자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공기는 청량했고 하늘에는 별이 빛났다.


-반가웠어 몸조심하고 건강도, 밥 잘 챙겨 먹고

-누나두요.


m과 짧은 인사를 하고 악수를 했다. 숙소로 가는 방향이 달랐기에 m과 나는 곧바로 등을 돌려 헤어졌다. 오늘 내가 느꼈던 감정은 너무 생소하고도 익숙한 낯설음이 있었다. 그게 뭣 때문인가. 나는 m에게서 어떤 열정 같은 것을 느꼈는데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그 열정에 대해 생각했다. 열정이라는 것이 꼭 전염되기라도 하는 듯, 감기나 독감처럼 특정한 증상을 시작으로 한 사람의 체내에 번지는 것처럼 m의 열정이, m의 눈빛이 자꾸만 눈에, 귓가에, 피부에 아른거렸다. 그 열정이 내게서 어떤 작용을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열정을 잘 어루만져서 간직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또 누군가에게 꺼내 보일 수 있게. 기역자 구조의 도미토리에 들어서자 창가의 달빛이 이층 침대를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