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퇴사
나의 첫 사회생활은 2016년도에 시작, 이세돌-알파고 세기의 대결이 이뤄지던 때였다. 기계와 인간의 승부라니, 세계가 들썩였지만 신규 간호사가 된 나에게는 그리 큰 흥미거리가 되지 않았다. 데이 타임 출근이면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고 12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특히 신규 때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가 매일 데이 근무였는데 거의 지옥과도 같았다. 입사 후 몇 개월 동안은 병원-집-병원-집 루트에 갇혀 지냈고 그와중에 매주 시험을 치고 약물 공부까지 병행해야 했다. 졸업을 하고 국가고시를 치른 후에도 해야 할 공부는 넘쳐났다.
당시에 만나던 남자친구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내 생활패턴을 잘 이해해줬고 매일 저녁 7시에 잠드는 나를 보며 안타까워 하면서도 장차 멋진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입사 후 4개월 차에 우리는 헤어졌다. 장맛비가 내리는 초여름이었다. 일이 힘들어서 헤어졌냐고? 그건 아니었다. 이별 후가 그렇듯 몸과 마음이 쉽게 지쳐가고 일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겹쳐 우울한 날들이 많았다. 다행히도 연차가 쌓일수록 상황은 나아졌다. 출근 시간이 조금씩 늦춰지고 적응된 업무 환경에 여유가 생기기도 했으며 연차를 붙여 제주도나 일본, 동남아로 여행도 갈 수 있었다. 입사 초기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는데 연차 내고 여행을 갈 때면 좀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교대근무를 계속 해오니 몸이 어딘가 삐걱대는 느낌이 들고 여기서 이렇게 일 하는 것이 맞는지 회의감은 멈추지 않았다. 모든 직장인은 사직서를 품고 산다고 했던가. 나 또한 그런 직장인 중의 하나였고 입사할 때에 ‘딱 3년만 일하자’ 결심했으므로 3년이 지나가길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 3년이란 시간이 죽을만큼 힘들고 견디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병원에서 만난 선후배와 좋은 관계를 쌓고 동기들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내과병동에서 일하는 동안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퇴사를 결심하고 보니 우리나라는 유독 이직에 민감하다는 걸 느꼈다. 사회생활 경력이 많지는 않지만 그런 분위기가 곳곳에 있었다. 내가 다니는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고인물이라고 불리는, 젊은 시절을 한 직장에서 보내고 결혼과 출산, 육아를 같은 곳에서 보낸 그들은 내가 퇴사 하겠다고 하자 ‘돈 모아서 시집 가야지’ 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28살이었고 집에서도 결혼의 기역자도 들은 적이 없던 때였다.
결혼이요? 제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감히 60살이 넘는 간호과장에게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 했고 대신 마음 속으로 가나다라마바사를 외쳤다. 간호과장님은 내 인사기록지를 넘기며 집도 가까운데 왜 자취를 하냐고 했고 부모님의 소중함을 모른다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네?
퇴사하겠다고 했을 뿐인데 스물 여덟 넘도록 결혼도 안 하고 부모님 소중함을 모르는 자식으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지. 그날 나는 간호과장님 앞에서 끝까지 퇴사 의지를 밝혔고 끝내야 4월 퇴사를 받아낼 수 있었다.
퇴사하겠습니다. 아직도 이 말을 들으면 가슴이 떨린다. 설레는 떨림이 아닌 두려움과 무서움이다. 나에게 누가 뭐라고 할까봐서, 직장을 관두고 무엇을 할꺼냐고 되물을까봐. 퇴사하는건 난데, 왜 남들이 그렇게 야단인걸까. 퇴직금 더 줄꺼야? 안그래도 간호사는 실업급여 해당도 안되는데. 물론 퇴사 이후의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축하와 격려는 못할 망정 그 나이에 회사 관두고 뭘 할거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