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보다 Go
퇴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여행이었다. 언제부턴가 배낭여행이 하고 싶었고 영화 <인투더와일드>를 보면서 자연 속에서 홀로 여행하는 주인공을 꿈꿔왔다. 비록 영화는 비극적으로 끝이 나지만 깨달음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값진 경험이 아닐까. 퇴사가 결정되고 나이트 근무를 하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여행으로 가득찼다. 안그래도 감성적인 내가 그 밤이되면 이상한 열정과 환상으로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나는 동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꽃피는 사월에 병원을 나왔다.
병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퇴사 후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 가족들과 후쿠오카에 갔다. 첫 가족 해외여행이었다. 그나마 가족들 중 여행을 많이 다닌 내가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들을 이끌었다. 사월의 후쿠오카도 부산처럼 봄이었고 꽃이 많이 피어있었다. 우리 가족은 긴린코 호수를 빙둘러 산책하고 사보 카페에서 잠깐 쉬었다. 나는 커피를 마셨고 엄마는 그린티를 마셨는데 그게 차였는지 라떼였는지 확실히 기억나진 않는다. 확실한건 엄마도 여행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 이런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후인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서는 노천탕에 몸을 녹였다. 엄마와 아주 오랜만에 가지는 단 둘만의 시간이었다. 물 속에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물 속에서 엄마와 나는 꽤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엄마는 물 속에서만큼은 말이 많았는데 평소에는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자연스레 이야기는 과거와 미래로 이어졌고 곧 떠날 세계여행에 대해서 말을 주고 받았다. 엄마는 나의 퇴사에 대해 나름 호의적이었고 내 선택을 지지해주는 사람이었다.
가족 여행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여행 준비로 바빴다. 환전을 하고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파마도 했다. 퇴사를 하면 왜 과감해지는걸까.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한 과감한 선택들을 퇴사 이후에 많이 했다. 히피펌과 타투를 했다. 주변 친구들은 다소 놀란 반응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떤 과감함은 자유로움 속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이후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의 목록들의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여행도 역시 그 중의 하나였고, 어쩌면 전부였다. 퇴사 이후의 가장 큰 변화는 컨디션이었다. 교대 근무를 하지 않으니 생활패턴이 일정해서 좋았고 수면 밸런스가 잡히니 두통이 자연스레 사라졌다. 커피를 몇 잔씩 마시며 두통과 싸웠던 지난 날들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이게 퇴사의 신체적 변화라면 정신적 변화로는 정서적인 안정감, 자기 효능감 같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회사에서 나와 불안 할 수도 있는 시기였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라는 믿음이 있었고 시간을 온전히 나에게 투자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있었다. 그것은 곧 삶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불러왔다. 한마디로 내가 활력 넘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회사를 나왔을 뿐인데, 내가 달라져 있었다. 내가 달라진걸까? 회사가 나를 변하게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