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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양 Oct 10. 2022

설탕과 요거트

오늘은 여기까지 걸을게요 

자신이 원하는 만큼 걷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춘다지만 그게 좀 불가능한 때가 종종있다. 코로나 시대에 길은 닫혀 있었고 이후에 조금씩 순례자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그곳에 있던 알베르게나 식당, 카페들도 문을 닫았을 것이다. 큰 마을은 기존에 살고 있는 주민이 있었겠지만 작은 마을은 민가가 없는 곳도 있고 폐가만 늘어선 마을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이후에 아무리 순례자가 많아졌다한들 운영하지 않는 알베르게가 많았다. 어떤 날은 그만 걷고 싶은데 알베르게가 없었다. 겨우 알베르게를 하나 찾았지만 문 앞에는 'cerado'  라고 적혀 있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건 '폐업'을 의미하는 스페인어였다. 이제 그 이후로 cerado 라는 글자를 보게 되면 말 없이 그곳을 돌아가게 되었다. 




아스토르가라는 큰 마을을 지나쳐 약 십 키로를 걸으면 무리아스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오늘은 거기까지 가기로 하고 천천히 길을 걸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발의 통증이 심했다. 약국에 들려 물집에 붙힐 투명 밴드를 두 개 사서 성당 앞의 벤치에 앉았다. 두 발은 엉망이었다. 내 발을 보고 있으니 더이상 걷는 건 무리라는 판단이 앞섰다. 게다가 주변이 이렇게 알베르게가 많은데..... 성당 앞은 관광객으로 붐볐다.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담배를 태우고 맥주를 마시고 너무나 편안해 보이고 좋아보였다. 반면 나는 지친 몸으로 발에 밴드를 붙이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길을 걸으며 모든 순례자들이 매일 하는 생각일 것이다. 나는 결정하지 못한 채 다시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몸이 움직이는대로 걸었다. 걸으면서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작은 슈퍼가 보였다. 조금 머뭇거리다 들어갔다. 간단한 샐러드와 빵을 사서 나왔다. 


마을을 벗어나자 큰 도로가 나왔다. 도로 옆에는 'astorga'라고 크게 적혀 있고 빨간 줄로 그어져 있었다. 아스토르 반대 방향이라는 의미였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도로에는 자동차만 달릴 뿐 아무도 없었고 시간은 벌써 두 시가 넘어 있었다. '괜찮아 천천히 걷자' 신기하게도 어떤 불확실한 상황에 마주쳐도 마음 구석에서 든든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괜찮다라고 느껴질 때.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없지만 그래도 길은 있을거라고 느껴질 때. 마음의 소리를 따를 때 그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마치 운명처럼. 기적처럼. 


길게 이어진 언덕을 하나 넘고 작은 숲길을 걸었다. 저만치에 사람이 두 명 보였다. 나처럼 이 불확실함을 견디고 걷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헤드폰을 끼고 팟캐스트를 재생했다. 때로 길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거나 음악을 듣는 건 큰 힘이 된다. 좋아하는 팟태스트 방송을 듣다가 일시정지를 눌러 자연의 소리를 듣다가 몇 번 반복하니 무리아스 마을이 보였다.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슈퍼도 하나 없고 식당은 딱 두 곳. 헤드폰을 벗어 목에 걸치고 미리 저장해둔 알베르게를 향해 걸었다. 


'여기가 맞을까?'


알베르게는 다행히 열려 있었다.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가 나왔다. 굉장히 마른 체구의 사람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내 여권과 순례자 여권을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방을 안내해주었다. 숙소는 아주 작아서 침대가 있는 공간과 화장실, 샤워실이 전부였다. 침대도 여섯 개 뿐이었다. 게다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침대를 고르고 바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씻지도 않고 잠시 누웠는데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바깥으로 나왔다. 오후 여섯 시가 넘었지만 아직 해는 쨍쨍했다. 바람도 적당히 불고 몸의 피로도 적당히 풀려 있었다. 빨랫줄에 양말과 속옷, 옷가지를 널고 머리를 말렸다. 헤어 드라이어 없이 머리를 말린 지 보름이 넘었다. 그래도 충분한 게, 머리를 빗고 태양 아래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십 분 이내로 바짝 마르곤 했다. 평소에는 필수였던 물건이 필요치 않아 지는 거.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간절해지는 것. 내가 생활했던 것과 정반대로 되어가는 것. 여행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들을 느끼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지금 누리는 일상의 정반대로 되어 가겠지. 가만 앉아 있으니 정수리가 뜨겁다. 배도 슬슬 고파진다. 나는 작은 에코백에 일기장과 지갑, 필름카메라를 넣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 



아주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전체 마을을 둘러보는데 채 삼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다리를 조금 절뚝이며 필름카메라로 남의 집 대문과 커다란 나무를 담았다. 그리고 숙소 앞의 테이블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매일 숙소에 도착 한 후 휴식 시간에 일기를 쓴다. 일기는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주고 무엇보다 기록물로써 아주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날을 기록하는 방법 중 사진도 있고 메모도 있고 가끔 녹음을 하는 사람도 보았지만 펜으로 꾹꾹 눌러쓴 일기야말로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벌써 일기를 쓴지도 햇수로 육 년이 되어간다. 이젠 차곡히 쌓인 일기장이 나의 전재산이며 나의 전부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과거의 일기장을 펼치면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희미해진 과거가 뚜렷해지고 선명해진다. 하지만 가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도 있는데 그땐 아차 싶은 생각이든다. 대체적으로 상처받았던 기억, 이별의 순간, 창피했던 장면이다. 하지만 그 시간들도 나를 완성해준 조각들이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소중한 과거다. 모든 순간이 아름다울 수는 없지만 과거는 과거일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니 그 시간을 기억하며 좀 더 나아질 미래와 현재에 집중한다. 


일기를 쓰다가 다시 숙소로 갔는데 호스피탈로가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같이 먹지 않겠냐고 했고 나는 마침 먹을 곳을 찾아야 해서 그러자고 말했다. 평소라면 거절했을 텐데. 


그는 샐러드와 올리브, 바게트를 테이블에 놓고 물을 가져왔다. 소박한 차림이었지만 무엇보다 훌륭했다. 나도 내가 가지고 있는 복숭아 두 개와 치즈, 하몽을 꺼냈다. 호스피탈로는 내 음식을 사양하면서 자기가 차린 음식은 편히 먹으라고 손짓 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호의를 받았다. 영어에 서투른 그를 위해 번역기를 돌리며 짧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삼 년 전부터 이곳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별 달리 할 말은 없었지만 편안한 분위기였다. 매일 저녁을 이렇게 드신다고 했다. 대부분 혼자 먹고 가끔 아스토르가에 나가 장도 보고 식당에도 간다고. 심심하지 않을까.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내 앞에 있는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후식으로는 요거트도 먹었다. 그는 스페인식 요거트 먹는 법을 알려주었다. 요거트에 흑설탕을 두 스푼 가득 넣어 조금 섞은 후 떠 먹는 것이었다. 요거트에 설탕을? 의심을 품고 한 입 먹었는데 촉촉한 요거트와 돌돌 씹히는 설탕 입자의 조화는 여태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달달하고 시원한 맛. 이게 스페인의 요거트 맛이구나. 그 이후로 나는 종종 요거트에 설탕을 넣어 먹었다. 아마 한국에서도 그리워 질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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