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 걸을게요
오스피탈 데 오브리고로 가는 길에는 옥수수 밭이 많았다. 좀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수 십키로를 걸었는데 그 밭이 다 옥수수였으니까. 삼 년 전 이곳을 걸으며 기욤과 내기를 한 적이 있다. 난 이 밭이 옥수수라 생각했는데 기욤은 아니라고 했다. 계속 우기다가 내기를 하자고 했는데 내기를 하자고 한 것만 기억나고 나머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중요하지 않았거나 재미 없었거나 둘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중요하지 않으니 재미가 없는건가?
기욤이 옥수수가 아니라고 확신했던 이유는 옥수수가 열리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옥수수가 어디있는데?' 기욤은 이 말만 되풀이 했다. 나는 아직 열매가 익기 전 이라 했지만 믿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옥수수가 맞았는데.... 지금은 옥수수가 노오랗게 잘 익어서 착각하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렇게 넓은 밭을 누가 관리할까? 이 많은 옥수수는 어디로 갈까. 어떤 맛일까. 그런데 이 옥수수들... 수확은 하는걸까?
사실 옥수수 걱정 할 때가 아니었다. 걸을수록 발의 통증이 날카로워졌다. '물집이 또 어디 생겼구나...' 벤치가 나오면 잠시 쉬면서 발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앉아서 쉴만한 곳이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알베르게에 딸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렌지 주스 한 잔 주세요"
밖에서 마시다가 나갈 수 있게 주문과 동시에 계산도 마쳤다. 주스를 들고 가려는데 사장님이 갓 나온 또띠아 한 조각을 주셨다. 나는 절뚝이면서 걸어나가 신발끈을 풀고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양말을 조심스레 벗었다. 생각보다 발은 양호했다. 다만 양쪽 아기 발가락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밴드와 바늘을 꺼내 간단한 조치를 취하고 발을 말려 주었다. 이렇게 오래 걸을 때면 주기적으로 양말도 벗고 발을 건조시키는게 중요한데 내가 그걸 놓치고 있었다. 나는 공짜 또띠아와 오렌지 주스를 허겁지겁 먹었다. 배도 고팠나보다. 한창 멍때리며 가만히 있었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십오키로 정도. 정말 어떻게가지? 문제는 해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숙소에서 만든 샌드위치를 꺼냈다. 여기서 에너지를 충전해야 남은 길이 편할 것 같았다. 걸으려면 먹어야지. 물집은 아팠지만 대충 만든 샌드위치는 너무나 맛있었다. 길 위에서 먹는 음식이 맛 없을리가 없지. 하지만 샌드위치를 자주 먹다보니 한번씩 물릴 때가 있다. 한식이 그리워질 때가 된것이다. 여기서 샌드위치가 아닌 김밥을 먹었더라면, 유부초밥을 먹었더라면.......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어 호호 불어 먹었더라면. 나는 아마 물집 잡힌 발로 씩씩하게 걸었을 것이다. 엄마의 집 밥이 그리웠다. 이후로 나는 '한국에 가면 먹을 음식'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치찌개, 김밥, 비빔국수, 떡볶이.... 죄다 탄수화물에 살 찌는 음식들. 그래도 스페인에 와서 좋은 것은 샐러드를 자주 먹고 있다는 건데 그것도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말이다. 그리고 여기와서 바뀐 식습관이 하나 생겼다. 내가 양파를 먹게 됐다는 것! 원래 익힌 양파가 아니면 절대 먹지 않았던 나였다. 그러다 우연히 샐러드에 생 양파가 있는 걸 봤고, 남기는 게 너무 아까워 조금씩 먹다보니 양파의 맛에 반하게 된 것이다. 알싸하고 달달한, 아삭한 과자 같았다. 이 맛을 왜 여태 몰랐을까? 이 맛있는 걸 여태 가족에게, 친구에게 줬다고 생각하니 조금 억울한 기분이었다. 하긴 양파를 안 먹는 나를 그들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었지.
때로 우리는 그때는 몰랐던 것을 나중에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런 영화 제목도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때는 양파의 맛을 몰랐고 지금은 그 맛을 안다. 여기서는 믹스 샐러드에 소금을 살짝 뿌리고 올리브유를 둘러 바게트를 손으로 뜯어 먹는 맛으로 살지. 김밥은 없어도 아주 싱싱한 아스파라거스가 있고 고추장은 없어도 질 좋은 올리브유가 있다. 나는 조심스레 신발을 신었다. 배낭을 고쳐메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얼른 마을에 도착해 올리브유를 듬뿍 두른 샐러드와 와인 한 잔을 마시고 싶다.
어떤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런던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는 간단한 통성명을 하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었다. 남편의 이름은 앤드류, 아내의 이름은 메리였다. 휴가기간에 짧게 나와서 며칠 후면 런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앤드류는 순례길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궁금해했다. 어제도 한국인을 봤다고 하면서.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전이다. 최근이 되서야 방송에 나오고 몇몇 유명인들이 이곳에 오면서 더욱 유명해진 것 같다.
"나는 책으로 먼저 알았고 친구가 추천해줬어. 근데 요즘은 방송에도 가끔 나와"
앤드류는 이어서 왜 이 길을 또 택한거냐고, 북쪽길도 있고 포르투갈 길도 있고 다른 길도 있지 않냐고 했다.
"그냥 한 번 더 걸어보고 싶었어. 오로지 혼자서, 지난번엔 여러 사람들과 걸었거든. 그리고 그냥 좋잖아"
'TAlK, WALK, DANCE, buen camino'
자신을 춤 강사라고 소개한 앤드류. 그의 가방엔 박스 종이가 걸려 있었다. 글씨가 희미했지만 앤드류가 손으로 직접 적은 것 같았다. 그의 춤 사랑과 까미노에 대한 열정이 느껴져서 좋았다. 짧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이었다. 앤드류와 메리는 걸음이 빨라 금방 나를 제치고 멀어졌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see you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