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고자 한다는 결심

연극 <엔들링스> 리뷰

by 강가든


_ 아주아주 오랜만에 대전예술의전당에 갔습니다. 대전예당은 대학생 때 수업 덕분에 처음 가봤는데, (그때도 대전예당 기획 연극을 봤습니다.) 볼만한 프로그램이 많고 건물이 멋있어서 좋아합니다. 공연을 많이 보는 사람은 아니라 자주 가진 않지만.. 가끔 요즘엔 뭐뭐 하나 싶어서 홈페이지 들어가 보는 정도.? 그리워만 하는 정도..? 어쨌든 그동안 그리워만 하다가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간 대전예당은 여전히 멋있었습니다.
보고 온 공연은 연극 <엔들링스>. 저의 주저리주저리 리뷰이기 때문에, 이 글에는 연극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라고 할 건 없지만 그래도..



<엔들링스>는 한국의 섬 ‘아일랜드오브만재’에 사는 해녀들 ‘한솔’, ‘고민’, ‘순자’의 이야기에서, 중간에 미국에 사는 동양인 이민자 여성 ‘하영’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조금 더 지나 맨해튼에서의 하영의 이야기로 배경이 바뀐다. 극작가인 하영은 작품으로 백인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 해녀 일을 하는 노년의 한국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래서 그는 계속 ‘부동산을 위해 내 피부색을 팔고 있다는’ 자기비판과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라는 잠깐의 허무함을, 그리고 그럼에도 부동산을 가지고 싶고, 극작가로 인정받고 싶고, ‘너무나 존재하고 싶다는’ 열망을 말한다.


이 연극은 해녀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다에서 일하고 잡은 것들을 팔고 집으로 돌아가 잠에 들고, 다음날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계속 이 섬을 (자신들은 떠나지 않을 테지만) 떠나는 것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중간에 하영이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동양인으로서 미국에 사는 이민자의 이야기로 중심이 바뀐다. 그래서 하영의 말처럼, 이 해녀들 이야기는 결국 하영이 부동산과 명예를 갖는, 즉 하영이 미국에서 ‘존재하기 위해’ 소비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그래서 하영과 함께 고민하게 된다. 그래도 이쪽에서는, 백인 남편이 말하는 것처럼, 백인들은 하영의 이야기를 알 수가 없으므로 애초에 쓸 수도 질투할 수도 없다. 하영의 이야기는 이들에게 특색이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동양인이자 이민자이자 예술가로서의 고민이 겹쳐 흐른다. ‘이걸 쓸 거긴 한데 내가 이걸 진짜 써도 되나?’ 같은.



그러다 마지막에, 하영과 한솔의 맞물리며 이어지다 합쳐지는 대사처럼, 그들도 정체성으로 맞물리며 이어지고 존재감으로 합쳐진다. 그게 백인들 사회에서 살아가며 할 수밖에 없는 생각들의 해소는 아니지만, 자신이 지금 살고 있고 성공하고자 발 붙이고 있는 맨해튼에 ‘존재하고자’하는 하영이 한국의 섬에 엔들링스로 ‘존재하는’ 해녀들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으로 자기비판과 허무함 같은 것들은 내버려 두고, 일단 이곳에 존재해보고자 한다는 어떤 결심 같은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맨해튼 섬에서 이민자인 하영이 백인들 사회에서 한탄하면서도 일단 이 희곡을 쓴다는 것은, 한국의 섬에서 ‘엔들링스’인 해녀들이 삶을 한탄하면서도 계속 물질을 하며 살아가는 것과 연결된다.


하영은 ‘맨해튼섬을 (정확한 대사는 기억이 안 나는데) 본인으로 덮고 싶다’고 말한다. 엔들링스를 포함한 연극과 패스트 라이브즈로 시작한 영화까지, 널리 사랑받는 예술가가 된 지금 셀린 송은 여기에 극작가로서, 영화감독으로서 아주 또렷이 존재한다. 작년에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고 나서 셀린 송의 어떤 작품이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대전예당에서 이 연극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무대를 보는 것은 (우리가 잘 모르는 삶이므로) 이민자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시작의 말처럼, 내가 이민자는 아니지만 어느 시기에 어떤 환경에서 느꼈던, 또는 보통의 일상에서도 느끼는 비슷한 감정을 생각하며 공감할 수 있었기에, 아마 많은 이들이 나처럼 그 비슷한 감정을 생각하며 또는 그보다 더 강하게 공감하며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셀린 송 극본이라는 것만 보고 간, 연극을 잘 안 보는 나라서 극본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연출도 연기도 새롭고 재미있었다. 특히 대본이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으로 띄워져 있어서 관객들이 텍스트를 함께 보게 하는 연출이 신기했는데, 텍스트의 폰트와 효과 같은 것들을 다르게 해서 그 대사의 분위기를 같이 살려주는 게 연출에서는 아무래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그 외에도 해녀들이 바다로 들어갈 때의 음향 효과나, 해녀들이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장면을 소품으로 표현하는 것, 무대감독 세 명이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는 것 등등 내가 지금까지 본 (생각해 보니 두 번뿐인 것 같은데..) 연극과 비교해 보면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새로웠고, 극본부터 연출과 연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경쾌하기도 하고 생동감 있는 작품이었다.


셀린 송의 다음 영화 ‘Materialist’도 기대 중이다. 패스트 라이브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 한국인, 미국인 각각의 정체성이 배경이 되어 세 사람의 관계와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아마 패스트 라이브즈에서처럼 세 사람의 관계와 미묘한 감정,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의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더한 정통 로맨틱코미디이자 현대적인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영화도 좋아할 거라고 꽤 확신하고 있는데, 이미 패스트 라이브즈로 널리 증명된 셀린 송의 색깔이 이 영화에서도 물씬 느껴질 것 같지만 또 새로운 느낌일 것 같다.





(엔들링스는 두산아트센터, 대전예술의전당, 제주아트센터가 공동으로 기획, 제작하였다. 서울과 대전에서의 공연 이후, 이제 제주에서의 공연이 남아있다.)

극본 셀린 송 / 연출 이래은 / 출연 경지은 박옥출 백소정 양대은 이미라 이훤 홍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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