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우리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갈 수 없죠
*넷플릭스 시리즈 <러시아 인형처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어나야겠어, 나가야 해. 아침이 되기 전엔 집에 가야 해. 늦으면 하루가 힘들어질 거야.
<러시아 인형처럼>의 시즌 1에서 마치 알람처럼 기능하는 노래의 가사이다. 속절없게도 흥겹게 울리기 시작하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해리 닐슨이 일어나야겠다, 나가야 한다며 옛날 어릴 땐 늦게까지 춤추며 놀곤 했지만 나이 먹은 지금은 안된다는 말을 경쾌하지만 조금은 다급하고 어딘가 침울한 느낌으로 노래하기 시작하면, 주인공은 몇 번이고 깨어나서 계속 똑같은 상황을 마주한다.
처음에는 이 시리즈의 제작부터 연출과 각본까지 함께하며 주인공 ‘나디아’ 역으로 열연한 배우 ‘나타샤 리온’이 극 안에서 이 설정을 두고 겪을 일들을 상상하니 벌써 재미있어서 (그의 연기를 보는 것부터 일단 재미있을 테니) 보기 시작했다. 한 에피소드 당 30분 정도에, 시즌 1과 2를 합쳐 총 15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든 이야기를 이어서 쭉 보는 데에 시간이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재미있게도 다 보고 나서 이 이야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더 길었다.
그러니까, 경쾌하게 스쳐 지나가는 대사들이 웃겨서 집중을 놓치거나 디테일들을 놓치면 이 시리즈가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짧은 이야기 속의 모든 것이 서로 ‘쫀쫀하게’ 짜여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길어지는 의문들, 아마 내가 놓쳤을 디테일들에 대한 아쉬움이 점점 커져서 한 번 더 정주행을 했는데, 잘 한 선택이었다.)
나는 유쾌함으로 가득하면서도 모든 것이 서로 ‘쫀쫀하게’ 짜여있는 듯한 이 진지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시즌 1에서 어떻게 죽음에서 벗어나고 상처를 극복했는지에 대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거울’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디아’는 서른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날, 살면서 가장 기이한 일을 겪는다. 바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
죽게 되는 상황은 다양하지만 깨어나면 어김없이 자신의 서른여섯 번째 생일 파티로 돌아온다. 그는 도로에서 고양이를 찾다가 달려오는 자동차를 보지 못해 맞이하게 된 첫 번째 죽음 이후에도 몇 번이고 죽었다가, 똑같이 해리 닐슨의 ‘Gotta Get Up’이 흘러나오는 장소의 화장실에서 거울을 마주하며 깨어난다. 친구들, 다른 사람들, 노래 등, 본인 말고는 모든 게 다 똑같이 반복되는 듯하다. 나디아는 이 기이한 ‘무한 루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실마리를 찾지만, 죽음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무한 루프는 나디아가 ‘앨런’을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해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앨런은 나디아와 똑같이, 어떻게든 죽었다가 다시 자신의 아파트 화장실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깨어난다. 나디아와 앨런은 서로 뭔가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같이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걸 알아낸다.
첫 번째, 둘이 동시에 죽는다.
두 번째, 그들이 죽었다 깨면 다른 사람들도 영향을 받긴 한다, 얽혀있으니까.
세 번째, 뭔가가 나디아와 앨런 각자의 ‘첫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등.
여기에서 세 번째가 특히 중요한데, 나디아의 첫 번째 죽음이 차 사고였다면 앨런은 자신의 첫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디아는 모든 게 첫 죽음에서 시작되었을 거라며 우리 자신이 모르는 영역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그 ‘미지의 영역’을 끄집어내기 위해 나디아의 엄마 같은 존재이자 친구이자 상담사인 ‘루스’를 찾아간다.
루스는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미쳤다고 말하는 게 제일 무섭다며 상담받기를 주저하는 앨런에게 ‘이 방에서는 미쳤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거울 깨는 것을 포함한 여러 자잘한 것들에 집착했던 나디아의 엄마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를 듣던 앨런이 왜 거울이냐고 묻자, 루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반영. 존재의 증거. 또 다른 목격자. 그래서 치료사가 중요한 거예요. 아니면 우리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갈 수 없죠.”
거울.
그들은 이 기이한 무한 루프에서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보면 루스가 말한 거울의 이 기능들을 경험하게 된다.
거울은 반대편에 있는 무언가를 비춘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뭔가가 더해지지도 빠지지도 않은 그대로. 물론 제대로 된 거울이라면. 그리고 똑바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왜곡되지 않은 모습으로, 객관적으로.
앨런은 왜인지 계속 자신의 첫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디아는 앨런의 첫 죽음을 알아내기 위해 앨런의 밤에 동행하겠다고 말한다. 같이 첫 번째 날을 재현한다면, 앨런의 죽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같이 앨런의 여자친구 ‘비어트리스(이하 ‘비’)’의 집으로 간다. 비는 앨런에게 이 지치는 관계를 그만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또) 하고, 나디아도 그 현장에 같이 있다가 앨런의 편에 서서 시원하게 말을 뱉어주고는 같이 그 집을 나온다. 함께 술집에도 가고 나디아의 집에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앨런은 나디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디아의 물건을 구경하다가 어렸을 적 사진들을 꺼내놓는데, 그게 나디아를 화나게 만든다. 그는 나디아에게 내쫓겨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때 불현듯 자신이 옥상에서 스스로 떨어져 삶을 포기했다는 걸 떠올려 낸다.
나디아는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있다. 어렸을 때 나디아의 엄마 ‘노라’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루스는 어린 나디아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노라로부터 나디아를 보호하곤 했으며, 나디아도 루스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죄의식은 이 생각에서 피어났다.
나디아는 앨런이 자신의 집에서 찾아서 눈에 잘 보이도록 꺼내 놓은 사진을 보고 화가 나서 앨런을 쫓아낸 후, 집에 찾아온 루스에게 말한다. “엄마와 찍은 옛날 사진을 보면 뚜껑이 열려버려요, 루스.” 그러자 루스는 이렇게 묻는다. “네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니?” 나디아는 인간사가 과대평가되었다며 타인은 다 쓰레기라고 대충 (하지만 진심으로) 대답하지만, 루스는 우리에게는 타인이 필요하다며, 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말한다. 나중에 또 루스와의 대화를 통해 나디아는 자신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던 어릴 때와는 달리 지금은 죽음을 갈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 아무런 정보 없이 어쨌든 무한 루프를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각자의 내면을 조사하고 있던 셈이었고, 그렇게 그들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나디아는 자신이 엄마 사진만 보면 화가 나고, 엄마를 용서하지 못했고, 동시에 여전히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끌고 다니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자신이 죽음을 갈망하는 슬픈 삶을 산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며, 앨런은 자신의 정신 건강이 위태롭다는 걸 인정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어떤 기이한 일을 풀어야 한다는 상황 덕분에 자신을 거울처럼 그대로, 어떻게 보면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듯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