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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Feb 16. 2024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감상을 가르는 영화들; 가벼운 이야기


보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이 유난히 궁금한 영화들이 있다.

 

그들은 결국 행복했을까, 그들의 선택은 옳았는가, 꿈과 사랑 중 인생에서 더 중요한 건 무엇인가,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예술은 어떠해야 하는가, 같이 영화의 내용을 두고 의견이 갈릴 것 같은 영화들이 특히 그렇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갈린다. 그래서 계속 나라면 어떨지 생각하면서, 그걸 기회로 내가 갖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해 보게 된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의 다른 의견을 접하게 되면 또 그쪽에서 생각해 보고, 그렇게 생각이 넓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 속 사람들은 서로 정말 다르다는 걸 느낀다. (두 쪽으로 갈리는 것 중 하나가 누가 봐도 명확하게 옳은 것인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시선에 따라 의견이 갈려도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실관람객들의 관람평이나 블로그 글들을 몇 개 둘러본다. 그러면 가끔, 이 감상들이 각자의 어떤 부분들이 모여 만들어졌을지, 영화의 어떤 부분에서 지금의 마음이 정해졌을지 궁금해진다.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되짚어볼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영화를 막 보고 난 후보다, 그 영화가 끝나고 나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다시 생각했을 때 정리해야 할 생각이 더 많아지곤 한다. 그 영화에 관한 글을 써보고자 할 때는 더 그렇다. 이런 생각들은 그렇게 글을 써나가며 어느 정도 정리되곤 한다. 하지만 그 ‘정리’라는 게 그 영화에 관한 생각을 끝낸다는 건 아니다. 당연히 여전히 뭔가가 남아있을 수도 있고, 언젠간 또 바뀔 수도 있다.

 

*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아마, 각자의 여러 순간들이 모여서 마음이 정해졌을 것이다. 각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으며 너무나 다른 사람들인 우리는 각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고, 그에 따라 마음을 정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건 계속 유지될 수도, 계속 바뀔 수도 있다. 또는, 갖고 있던 시선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예전에 영화 <위플래쉬>가 개봉했을 때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리뷰를 구경하다가, 이런 감상평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 놀란 적이 있다. 잘못된 교육과 어긋난 욕심이 불러온 파멸이라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그래도 뭐든 끝까지 노력하면 된다는 걸 느끼게 해 준,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 볼 영화라는 말. (이 영화는 엔딩에 관한 각자의 해석도 다양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오히려 집념과 열정이 사그라드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과 집념의 희열이 더 크게 느껴졌을 테고, 어떤 사람들(내가 해당된다)에게는 끝이 너덜너덜한 욕심과 광기의 씁쓸함이 더 크게 느껴진 것이다. 그 중간이나 바깥에 또 다른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여러 영화가 사람들의 감상을 둘, 셋, 그리고 여러 개로 가른다. 이 분야에서 예전에 아마도 가장 유명했던 ‘<500일의 썸머>의 썸머가 그렇게 나빴냐’부터,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엔딩 후에 그들은 과연 서로 사랑하며 행복했을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드리아를 힘들게 한 ‘진짜 빌런’은 미란다도 다른 누구도 아닌, 앤드리아의 남자친구이지 않냐’, ‘<라라랜드>는 새드엔딩인가, 해피엔딩인가’ 등, 어떨 때는 가볍게, 또 어떨 때는 무겁게 생각해 볼거리가 있는 이런 이야기들은 영화가 나옴과 동시에 계속해서 쭉 그 영화의 클래식한 주된 이야깃거리가 된다. 또는 사회 분위기가 변하면서 갑자기 불을 탁 켠 것처럼 꺼내지기도 하고, 그 이야깃거리의 여론이 바뀌기도 한다.

 

(그나저나 500일의 썸머를 너무나 뒷북으로 최근에서야 본 나는, 정말 썸머를 아주 나쁘다고 보는 의견이 많았다는 것에 놀랐다. ‘아니, 진짜로? 나는 썸머가 무슨 대단한 못된 여자로 나오는 영화인 줄 알았네.’ 물론, 이것 또한 나의 감상이다.)

 

감상이 확연히 갈리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보면 참 재미있다. 완전히 공감할 수도 아주 의아해할 수도 있으니, 어떤 글에서는 공감이라는 즐거움을 얻는다면 어떤 글에서는 생각의 다름을 흥미로워하며 즐기는 것의 재미를 얻기 때문이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재미는 마치 친한 친구의 의외인 부분을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다던가, 나의 새로운 취향을 발견했을 때의 재미 같은 것과 비슷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재미뿐만 아니라,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기도 한다. 이런 배움은 뭔가에 둔했거나 무지했던 나를 순간적으로 부끄럽게 (죄책감이 들도록) 할 수 있지만, 그런 부끄러움은 다행히(?) 일단은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며, 순간일 뿐이다. 그 후에 더 그 부분에 관해 찾아보게 되니까. 그렇게 공부하게 되니 오히려 좋은 일이다. 내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


*

 

이렇게 사람에 따라 어떤 이야기가 받아들여지는 게 이토록 다르고 다양하다.

 

이 세상에 이토록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 또는 멀리 어딘가에서,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각자 일을 하면서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문득 실감할 때마다 느껴지는 새삼스러운 신기함은, 항상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내 생각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있고, 내 일상이 있다면 가깝고 먼 곳에 또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들이 있다는 것. 어떤 감상과, 반대의 감상과, 그 중간과 바깥에 있는 감상들이 있다는 것. 여기 이 세상에는 이렇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갈라진 감상들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는 것을 말이다.

 

다 당연한 말들이지만,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영화관에서 나올 때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거나, 집에서 여러 리뷰를 볼 때 떠오르는 이 새삼스러운 생각들로 뭔가 중요한 걸 느낀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이토록 다른 우리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 역시 이 세상에 발 딛고 서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잘 살아보자는 것 말이다. 뜬금없는 생각인가 싶지만 이게, 내가 영화가 만드는 여러 개의 가지들에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 닿는 곳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 세상의 부분으로서 각자, 그리고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이 생각이 나를 이상하게 안심시킨다. 내가 어느 한쪽의 가지에 서있는 동안 저 다른 쪽에 서서 계속 자신의 일상을 살고 있을 이 세상의 사람들, 위플래쉬를 보고 나서 열정이 타올랐던 사람들과 오히려 의지가 식었던 사람들, 그리고 500일의 썸머에서 결국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던 썸머와 톰이 모두 여기에 살고 있기에 이 세상이 재미있는 것이며, 그들과 나 모두 이 세상의 부분으로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말이다.

 

이렇게 갈라져 있더라도.

 

영화 <500일의 썸머>((500)Days Of Summer, 2009) 스틸컷




아트인사이트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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