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진짜 상관이 있는 것들은,
그날도 가까운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는 중이었다. 집 바로 앞에 있는 사거리의 횡단보도 두 번을 건너야 했고, 나는 그중에서 긴 횡단보도 하나를 건넌 후 나머지 하나인 짧은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내가 서 있던 그 사거리는 나의 친구 S와의 만남의 장소이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항상 이곳에서 만난다. S의 아파트와 내 아파트 사이에 있는 이 횡단보도를 내가 건너가든 S가 건너오든, 어쨌든 우리는 이곳쯤에서 만났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이곳쯤에서 손을 흔들며 집으로 돌아간다.
각자의 대학 생활을 마친 후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예전부터 살아온 이 동네에서 자주 만났고, 자연스러운 편안함과 친밀감은 그렇게 차곡차곡 쌓였다. 우리는 비슷한 데가 꽤 있고,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 그리고, 집도 가깝다.
이 이야기를 한 건, 그날 어떤 표지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S의 아파트로부터 300m’.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건데, 왜인지 그날 처음으로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서 있던 그 짧은 횡단보도에서 S가 사는 아파트 정문까지의 거리를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그런데, 300m?
나는 사실 이런 수치에 대한 감이 없는 편이다. 특히 거리와 돈에 있어서 그렇다. 몇 킬로미터가 어느 정도인지, 어디부터 어디까지 정도의 거리인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많거나 적은 돈인지. 물론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원래도 없던 감은 더 떨어진다. 그냥 얼마만큼 멀고 얼마만큼 큰지 짐작할 생각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마, 아직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큰돈을 계산해 봐야 하는 ‘어른들의 일’을 하거나, 먼 거리를 이동할 때의 킬로 수를 ‘자연스럽게’ 따져보게 되거나 하는 종류의 것들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300m라는 거리는, 그런 나도 아주 짧은 거리라는 걸 알만큼 가깝다. 거의 집에 있을 때가 많은 S와 나의 거리가 이 정도로 가깝다는 것, 그러니까 서로 거의 매일 각자의 집에서, 그러나 아주 가까이에서 각자의 일상을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은, 그렇게 갑자기 그 표지판을 발견하자마자 새삼스러워졌다.
초록불을 기다리는 동안 그 표지판만이 점점 커져 내 시야에 꽉 찼다가 몇 초 후 다시 제자리에, 원래의 크기로 돌아간 것처럼, ‘S야, 우리는 정말 가까이에 사네!’ 같은 혼잣말이 크게 튀어나올 뻔했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그 정도라는 걸 헤아려 보면서, 당장 S의 아파트 앞으로 달려가 S를 불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에 산다는 걸 더 실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나는 그냥 가만히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렸다. 어쨌든 그때 그 300m 표지판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우리가 이만큼 가까이에 있다는 것에, 이 정도의 분명한 기쁨과 위로를 느꼈다. 그러다가 눈앞의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 카페를 향해 계속 앞으로 걷는 동안, 그러니까 그 표지판이 멀어지는 동안 나는,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어서 멀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가 가까이 산다는 것에 기쁨과 위로를 느끼는 동시에 초조함을 느꼈다. 그 초조함은 곧 ‘균열’이었다. 가장 친밀하고 편한 친구를 언제든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따뜻한 안정감, 그 큰 행운에 초조함이라는 균열이 있는 것이다. 근데 난 이 균열이 존재하는 이유를 안다.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
나와 S는 언제든 꽤 쉽게 만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정해져 있는 일상을 해치지 않는 것까지 고려하면 그리 쉽진 않지만, 그래도 비교적 쉽다. 평일에도 쉽게 약속을 잡고, 둘 다 이동의 불편함 같은 것이 없다는 소리이다.내 생각에, 그럴 수 있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일단 우리처럼 가까이 살아야 하고, 또 하나는 ‘일’의 방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쉽게 충족한다.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몇백 미터 밖에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심지어 지금 나에게는 ‘일’이라는 것의 방해가 없다.
내가 느끼는 불완전한 안정감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내가 쉽게 충족한다는 것에서 오는 초조함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서로 엮여서, 내가 이곳의 한가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에게 오히려 안정감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거리 같은 건 사실 큰 상관은 없는 것이다. 각자의 직업을 갖게 된다면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멀어져도 아니어도, 각자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게 된다면 지금의 한가로움은 과거의 이야기가 될 테니까. 물리적 거리는 그저 상징적인 것뿐이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산다는 것보다는 나에게 일이라는 방해물이 없다는 것이 초조함의 원인이지만, 어쨌든 두 가지가 엮여있다고. 나는 아마 직업을 갖고 이곳을 떠나야만 안정감을 느끼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직업을 갖고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완전한 안정감이라는 걸 느끼게 될까? 낯선 장소, 낯선 일, 낯선 사람 등 새로운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는 사람인 나, 그러니까 직업을 갖고 이것을 떠난 언젠가의 나는, 결국 완전한 안정감이라는 건 그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도 내가 완전한 안정감을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낼 것이다. 이렇게 완전한 것 같았다가 아니었다가를 왔다 갔다 할 것이고, 그렇게 나는 마침내 불완전한 안정감과 완전한 안정감을 둘 다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더 넓은 감정들을 느끼며 사는 것, 그게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
상상해 보건대, 아마도 언젠가 새로운 길을 찾아 이 집과 우리의 만남의 거리에서 멀어지는 순간부터 아쉬움과 그리움이 빠르게 시작될 것이다. 평화롭던 횡단보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내 예상보다 더 빠르게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 그러니까 그 ‘언젠가’에는 ‘과거의 나’ 일 내가 사실은 그리 평화롭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는 ‘그 언젠가의 나’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고, 그 평화로워 보였던 장소에서 S를 만나는 건 이제 가끔만 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끔의 기회를 정말 가끔씩 맛보는 것에 기쁨과 위로를 새로이 느끼게 될 것이다.
300m 표지판을 봤을 때의 기쁨과 위로에 더해, 드디어 거리가 멀어진 것에 대한 기쁨과 위로, 그리고 너무나 큰 아쉬움과 그리움. 또 여기에 더해 우리가 만날 때 또 이 횡단보도 앞, 이 거리에서 만날 거라는 확신에서 나오는 새로운 안정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될 것이다.
*
결국 이런 건, 완전한 안정감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와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300m라는 가까운 거리 같은 것과도 상관이 없다. 완전과 불완전, 가깝고 먼 거리 같은 건 내가 지금 나의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감정의 주변에 있는 것일 뿐이다.
진짜 상관이 있는 건 나에게 일이라는 방해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편안하지만 동시에 불안하게 오래 머물렀던 이 장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느꼈으니, 이제는 정말 안정과 불안정이 섞여있을 낯선 어딘가로 향해야 한다는 것, 그런 것이다.
또 더해보자면, 무언가가 변화한 각자의 장소에서 여전히 서로를 소중한 친구로 여기며 사는 것, 그리고 우리의 장소가 멀어진 후의 어느 날, 이 횡단보도에서 만나 어느 카페에 들어가서 앞에 비슷한 취향이 담긴 컵을 각자의 앞에 두고 이야기하던 꿈같은 것들과 우리가 아마도 앞으로 해야 그런 것들을 정말 해나가고 있는 것,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
그러니까 이런 게, 내가 바라는 것이다.
방금 또 300m 표지판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머릿속의 S와 함께 이 카페까지 걸어온 내가 앞으로 바라는 것, 진짜 상관이 있는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