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도하게 하는 붉은 쉼표
'철컥' 차 문을 닫고 나서야 긴장했던 하루가 비로소 멈췄다. 익숙함에 젖어 거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퇴근길에 나선다.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불투명한 내일을 선명하게 그리려 할 때, 야트막한 언덕을 마주한다. 차체를 정상에 올리는 순간, 흐렸던 정신이 현재로 돌아온다. 하늘이라는 거대한 바탕을 어느새 붉은빛이 뒤덮었다. 이곳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해졌을 때나, 한없이 작아졌을 때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성소다.
쭉 뻗은 도로 양옆, 빽빽한 건물들의 좁은 틈새마다 노을빛이 스며든다. 그 붉은빛이 앞 유리를 넘어 내 시선에 닿는 순간, 도로 위를 채우던 거친 경적과 엔진 소리는 아득하게 잦아든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 벅찬 풍경. 대자연이 베푸는 과분한 환대에 경직되었던 몸이 스르르 허물어진다. 붉게 물든 노을빛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 듯 가슴 깊은 곳까지 온기가 전달된다. 차갑고 투박했던 콘크리트 건물들을 노릇한 쿠키처럼 먹음직스럽게 구워낸다.
세상은 남향이 최고라고 외친다. 나는 이 낮고 겸손한 서향의 빛 속에서 가장 달달한 안식을 맛본다. 노을은 종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육체의 피로를 풀어내고, 내일을 향한 조바심마저 덮어준다. 비로소 나에게 오롯한 여유를 이끌어 준다. 따스했던 날, 창문을 살짝 내리면 차가운 도시 공기를 뚫고 다리 난간의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곤 했다. 지금은 계절에 밀려나 텅 빈 뼈대만 휑하니 남아있지만, 노을이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준다. 차 안의 퀴퀴한 공기마저 지워내던 그 향긋함에, 거친 일터의 잔내마저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린다.
황홀했던 빛을 건물이 잠시 어둠으로 가둘 때, 나는 기억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서늘한 공기를 음미하며, 다시 나타날 찬란함을 애타게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건물이 만든 짧은 그늘을 지나, 이제는 길고 캄캄한 지하 터널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나는 짙어지는 아쉬움을 삼키며 가만히 숨을 고른다. 세상 빛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현실의 무게가 내려앉지만, 내 심장은 아까 맛본 다정한 온기를 기억하며 차분하게 뛴다. 매일 같은 길 다른 감동을 주는 저 노을처럼, 나 역시 내일은 보다 더 온화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또다시 마주하게 될 붉음 쉼표를 기약하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버텨냈음에 깊은 안도를 내쉰다. 언젠가는 이 무거운 긴장을 모두 허물고, 하루하루 노을의 시작과 끝을 바라볼 수 있는 찬란한 저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