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넘어 웹소설작가에 도전한다.
요즘들어 오배송이 늘어나고 있다. 몸은 택배포장을 하고 있지만 머리는 온통 글감생각에 물건들은 자꾸 엉뚱한 집으로 가고 있다. 글쓰기 영감을 얻는 대가치고는 부담스러운 왕복배송비이지만, 글쓰기가 점점 재밌어지고 있다.
초 2 때의 일이다. 놀기만 좋아하던 나는 난데없이 교내 산수 경시 대회에서 100점을 받았다. 전교에 만점자가 두세 명뿐이던, 내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 아카데믹한 성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순도 100%의 운이었다. 공부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기에, 선생님이 건네준 빳빳한 상장에서 내 이름부터 확인했다.
'우리 반에 나랑 같은 이름인 내가 모르던 친구가 있었나?'
어안이 벙벙함이 지속되다, 하교할 때쯤 정신을 차리니 머릿속은 도파민으로 절여졌다.
'드디어 나도 사람 취급을 받겠구나!'
물론 그때는 이런 성숙한 생각은 아니었을거다. 적어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매일 말썽만 피우던 아이가 생전 처음 당당하게 칭찬받을 거리가 생긴 것이다. 오늘 저녁은 돈가스일까, 갈비일까? 아니면 비비탄 총이나 RC카?
자본주의의 달콤한 보상에 대한 기대치가 대기권을 돌파하고 있었다. 학교 정문을 나서자마자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숨이 차면 걷고 진정되면 다시 뛰었다. 분명 등에는 버젓이 가방을 메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장을 거머쥔 채, 대중교통이라는 훌륭한 문명의 산물이 있었음에도 굳이 두 다리로 비를 맞으며 질주했다
도착한 곳은 상계백병원이었다. 하필 어머니는 1~2일 전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 중이셨다. 초등학교 2학년 짜리가 계상국민학교에서 병원까지 2km가 넘는 거리를 비를 맞으며 뛰어갔다니. 이 글을 쓰며 처음으로 지도를 찍어보고는 헛웃음이 절로 났다. 순간 만화 주인공 병에 단단히 걸렸던 게 틀림없다.
정리하자면 산수 경시대회 만점 자라기엔 공간지각 능력과 효율성 계산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역시 내 실력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마침 아버지도 퇴근 후 병실에 계셨다. 비에 홀딱 젖어 숨을 헐떡이는 작은 꼬마가, 마찬가지로 빗물에 불어 터진 눅눅한 상장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소리쳤다. (그 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엄마! 나 백점 받았어!!"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린 짧고 강력하게 툭 던져졌다.
"으.. 응 그래."
그 어느 때보다 건조하고 무심한 대답이었다. 초 2가 2km를 걷고 뛰며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며 칭찬과 보상들의 모래성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 끝이었다. 돈가스도, RC카도, 감동의 눈물도. 남은 건 병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와 더럽게 뻘쭘해진 나뿐이었다. 그 뒤로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도 꽤 충격을 받았겠지. 어쩌면 빛났을 나의 학구열은 그날 병실 바닥에 빗물과 함께 증발해 버렸다. 가끔은 그때 칭찬을 받았다면 지금쯤 의사, 검사, 변호사...(절레절레)
'아, 학교 점수 따위 잘 받아봤자 칭찬은 커녕 부모님이 그리 좋아하시는 일이 아니구나.'
충격적인 사건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이런 훌륭하고도 심플한 결론을 내렸고, 그 길로 공부와는 영원히 작별했다.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어머니는 교통사고 통증으로 마취제를 맞아 제정신이 아니셨다고 한다. 정확히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으신다고... 역시나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내 학업의 꿈을 꺾은 건 부모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진통제였던 것이다. 일찌감치 '공부 무용론'을 깨달은 나는 성악가, 만화가 등 예체능 쪽으로 자연스레 눈을 돌렸다. 하지만 현실은 예술보다 가혹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나는 낭만을 접고 자본주의에 굴복해 직업군인의 길을 택했다.
처음엔 평생 군복을 입으려 했다. 부사관으로 구르다 보니 리더십도 생기고 사회성도 탑재됐다. '어라? 나 제법 군대 체질인가?' 싶어 자신감이 붙었지만, 4년 군복무를 마치고 쓰잘데기 없는 자신감만 믿고 중사 제대를 감행해버렸다. 사회에 내게 맞는 직업은 웹디자이너가 딱이라 생각했다. 평소 만화와 컴퓨터를 좋아하니까 천직이라고 그 당시 결론내렸다. 첫 직장은 아동복 온라인 쇼핑몰 회사였는데 문제는 월급이었다. 통장에 찍힌 첫 월급은 100만 원.
초 2 산수 경시대회 100점인 놀라운 산수 실력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생활비를 보태고 한 달에 50만 원씩. 숨만 쉬며 적금을 부으면 1년에 600만 원. 10년이면 6,000만 원. 이자를 쳐줘도 삼십세 중반에 수도권에 낡은 빌라 전세금이나 낼까 말까 한 돈이었다. 현역 시절 받던 120~160만 원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집값은 미친 듯이 오르는데 내 월급은 귀여웠다. 괴롭긴했던건지 근복무를 이어가며 안정적으로 급여받는 꿈을 종종 꿀때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투잡을 뛰었다. 네이버 지식iN과 블로그에 "상세페이지 싸게 해 드립니다." 하고 글을 올리자, 세상에 싸고 좋은 걸 찾는 사장님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어라? 이게 되네?' 싶어 플래시 영상과 홈페이지 제작까지 독학하여 서비스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어느새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프리랜서로 투잡 수익이 월급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1~2년 주기로 6번 정도 회사를 갈아탔다. 한 회사에 오랫동안 일하는 지인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생각이 들면서도 회사일을 365일 채우는게 왜 그리 어려운지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취향 탓에 흥미로운 공통점을 경험했다. 저마다 회사들은 가파르게 성장했던 때가 있었지만 줄줄이 망해가는 것을 실시간 1열에서 관람했다. 마지막 한 곳 빼고. 게다가 투잡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수백 개의 거래처 사장님들.
이쯤 되면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회사 시스템만 봐도 '아, 여긴 조만간 망하겠구나' 하는 견적이 나왔다. 다양한 실무 경험과 투잡으로 다져진 짬바이브 덕분에 나는 자연스레 온라인 비즈니스 컨설턴트급 시야를 갖추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남의 밑에서 회사가 망해가는 걸 지켜보느니, 내 손으로 직접 망해보자(혹은 흥해보자)는 심정으로 온라인 컨설팅 사업을 이어 온라인 쇼핑몰 창업까지 이르렀다. 당시 고졸 스펙에 포토샵 조금 끄적이던 실력으로 시작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며 나름 자리를 잡았다. 보람도 있었고 직장생활보다 통장 잔고가 부쩍 늘어날 때의 짜릿함도 있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돈을 벌어도 시장 분위기에 따라 매출이 반응하는 것으로 불안감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공격적으로 규모를 키워 다시 한번 열정을 불태워볼까? 그러나 신문물을 경험한 똑똑하고 젊은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였다. 최근 들어 나름 다져오던 체력이 꺾이는 게 느껴지자 더더욱 자신감도 떨어지고 의구심이 들었다. 누구는 빠르게 규모를 키우며 가파르게 성장한다던데 왜 나는 고민하고 주저하고 있을까. 왠지 이 일을 계속 붙잡고 있다가는 '익숙해진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늙어가면서 결국 가치 하락이자 재고처리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절망감마저 돌았다.
평일 택배 송장을 뽑을 때면 그 고민은 더욱 강열하게 요동쳤다. 이러다가 나 자신이 송장이 되어 박스에 포장될 것만 같았다. 혹여나 어딘가에 배송되면 반품될...어디엔가 나라는 사람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시장의 파도에 휩쓸리는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을 팔고 싶었다. 단순히 팔아서 돈 버는것을 넘어 과정자체가 축적되어 나 자신에게 배움이 되고 지혜가 된다면, 최소한 늙어서 '쓸모없는 재고' 취급은 받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중학교 시절 만화를 그리며 즐거워하던 꼬마가 생각났다. 그때 참 무언가 상상하고 표현하는 게 참 좋았는데. 그림은 오랫동안 손을 놔서 무리지만, 나에겐 산전수전 겪으며 다져진 인과관계? 뭐 그런 나만의 스토리 같은게 있지는 않을까? 그것에 자유롭게 상상을 더해 웹소설이라면 해볼만 하지않을까? 글쓰기라면 나이가 들어도 충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안다. 현업 작가들이 마감의 압박에 시달리고, 창작의 고통으로 머리털을 쥐어뜯는다는 것을. 하지만 CS 전화로 진상 고객에게 영혼을 털리는 고통이나, 하루하루 주문량을 보며 안도하는 고통보다 낫지 않을까.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종류는 다른 법이니까. 나는 차라리 내 상상 속 주인공을 굴리며 고통받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적어도 글쓰기는 나이의 제한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지금 하고 있는 밥벌이를 서서히 정리하고, 택배 송장 대신 문장을 뽑아내며 진짜 나를 만나는 여정을 떠나보기로. 진통제에서 비롯된 산수 경시대회 100점을 맞아도 쓸모 없음을 깨달았던 꼬마가 마침내 기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