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로 공들여 절연했건만, 그가 다시 연락 왔다.

무례한 질문에 냉정하게 답장 보낼 수 있었던 이유

by 강게리

평소 같으면 한가로웠을 수요일 오후 1시 15분. 휴대폰 화면에 뜬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어이가 없었다. 주현이 형이었다.


'대체 무슨 염치로 다시 연락을 한 거지?'


막연한 불안감이 정수리를 타고 스며들었다. 나는 불안을 잠재우려 뇌를 풀가동했다. 혹시 내가 이전에 여지를 남긴 적이 있었나? 스크롤을 올려 과거의 카톡 대화를 더듬는 손을 불안감이 재촉한다. 화면을 쓸어 올리는 손끝이 서늘해졌다. 인관관계에서 갈등이 예고될 때면 어김없이 발동하는 내 몸의 방어 기제였다. 역시나, 내 잘못이나 놓친 맥락 따윈 없었다.그는 지인에서 사업 파트너로 시너지를 내보려다, 실망을 넘어 배신감만 아낌없이 선사해 준 사람이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피하려고 챗GPT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그토록 정중하고 완벽하게 '절연'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가.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는 그의 마지막 답장을 보며 AI문장력에 감탄하고 안도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끝낸 인연인데, 뻔뻔하게 다시 무역 업무를 도와달라며 손을 내민 것이다.


모니터 앞의 내 몸은 기계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과거의 찝찝한 기억과 혼란으로 뒤엉켰다. 곱씹을수록 불쾌감의 불씨가 타올랐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동요가 아니라 단호함과 냉정 함이었다. 정상적인 일상을 지켜내기 위한 필수 방어막 말이다. 문득문득 그를 향한 멸시와 안타까움이 뒤섞여 올라왔지만, 함부로 내어주는 동정과 연민이 나를 얼마나 갉아먹는지 이미 뼈저리게 배우지 않았는가.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로 했다.


'오늘 업무가 끝날 때까지 절대 이 카톡을 답장하지 않겠다.'


스스로에게 단호하게 선고를 내리고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신기하게도 그 결심 직후, 서늘했던 손끝에 다시 온기가 돌며 정상으로 돌아왔다. 퇴근 후 집에 온 뒤에야 미뤄두었던 카톡 창을 열려는 찰나 주현이 형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자신의 도움 요청을 윈윈거래로 알고 있는 뉘앙스의 내용이었다. 그 메시지는 또다시 내게 명확한 확신을 주었다. 그는 여전히 우리의 관계가 왜 끝났는지, 비즈니스의 기본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뻔뻔함에 서운하고 무례함에 불쾌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불쾌함 덕분에 나는 더 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답장을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앞으로는 제 일에만 집중하려고 해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던 감정의 파도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아까는 분명 세상을 태울 듯 뜨거운 불쾌감이었는데, 결단을 내린 순간 그것은 차가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이번 일을 겪으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감정은 영원히 나를 지배할 것 같다가도, 내가 단단한 중심을 잡는 순간 흩어져 버리는 '찰나의 속성'일 뿐이라는 것을. 휘둘리지 않고 나를 보호하는 법을 배운 것만으로도, 오늘의 이 소란스러운 수요일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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