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흩날리는 인파 속에서, 뜬금없는 오지랖이 발동했다. 지금쯤 암막 커튼 안에서 넷플릭스와 생존 게임 줄일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해진 것이다.
아이 없이 단둘이 사는 우리 부부에게 불금의 여유란 꽤나 당연한 일상이다. 아내는 한 손엔 핸드폰을, 다른 한 손엔 내 손을 꽉 쥔 채 연신 "어머, 너무 예쁘다!"를 자동응답기처럼 연발하며 봄을 만끽하고 있다. 머리 위로는 연분홍빛 벚꽃 잎이 흩날리고, 다정하게 서로를 앵글에 담는 연인들, 그리고 내 곁에서 환하게 웃는 그녀. 이 완벽한 봄날의 수채화 속을 걷고 있으면서도, 나의 기억은 자꾸만 10여 년 전, 누구보다 칙칙했던 나의 30대 방구석으로 타임슬립을 하고 있었다.
30대 시절의 나는, 봄이 오면 세상과 철저히 거리 두기를 하는 낭만 파산자였다. 남들이 장범준의 '벚꽃 엔딩'을 국가 민요처럼 부르고 다닐 때(하필 벚꽃엔딩이 그 시절쯤에 나왔다), 나는 내 방에서 미드를 보며 은둔생활을 이어나갔다. 당시 내게 직장 생활이란 매일이 영혼을 갈아 넣는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평일 내내 상사의 눈치를 보고 거래처에 에너지를 쏟고 나면, 주말엔 말 그대로 '방전된 배터리'가 되었다. 남들은 짝을 지어 윤중로로, 석촌호수로 떠났지만, 내겐 그 화려한 인파 속에 뛰어들 체력도, 무엇보다 '함께 갈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와 밥을 먹고 일정을 맞추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피로로 느껴지던 때였다. 꽃가루 알레르기보다 무서운 게 '인간관계 알레르기'였달까.
"벚꽃은 무슨, 차 막히고 사람만 많지"
쿨한 척 방어기제를 펼쳤지만, 사실 화면 너머의 세상을 보며 아주 가끔은,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외로웠다.
그런 흑백영화 같던 내 삶에 아내가 등장했다. 자연을 즐길 줄 아는 그녀를 따라 나도 어느샌가 꽃구경을 즐기는 방법을 배웠다. 혼자일 때는 그토록 귀찮고 쓸데없어 보이던 벚꽃이, 아내와 함께 걸으니 비로소 예뻐 보였다.
인파 속을 걷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10년 전의 나처럼,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배달 음식 용기를 치우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의 다음 화 재생 버튼을 누르고 있을 누군가들을 떠올렸다. 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지만, 그것을 즐길 체력과 마음의 여유는 결코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벚꽃 보러 갈 사람이 없어서, 혹은 사람에 치이는 게 너무나 두려워 각자의 방공호로 숨어든 그 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그건 결코 우리가 도태되었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험난한 각자도생의 일주일을 버텨낸 우리의 영혼이,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선택한 '비상 충전 모드'일뿐이다.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이는 이 잔인한 계절에, 차라리 창문을 닫고 화면 속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은 때론 꽤나 훌륭한 생존 전략이다.
그러니 침대 위에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겼던 과거의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오늘은 아무 죄책감 없이 하던 넷플릭스 정주행이나 맘 편히 마저 하라고. 꽃은 진다고 끝이 아니라 내년에 어김없이 다시 피어나며, 네가 맞이할 진짜 눈부신 봄날은 아직 재생 버튼조차 누르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