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는 잼 된 프린터로 찍은 문화역사책이다

여행가방으로 기록한 여행

by 강하단

매거진 공통적용 “기호”의 정의: 기호sign란 자신이 의미를 전달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도구인데, 아이콘, 인덱스, 상징으로 나뉜다. 특별한 설명없이 딱 보면 알수 있는 것이 아이콘 기호인데 나무가 여러개 그려져 있으면 숲이라고 아는 식이다. 주식 사이트의 화살표와 숫자는 인덱스 기호인데 주식상황을 화살표와 숫자만으로도 물리적 연결을 통해 알 수 있다. 상징기호는 약속한 내용을 설명듣고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언어가 대표적인 예다.


여행가방에 옷가지와 세면도구, 그리고, 노트북, 책과 선물을 넣다보면 가방의 크기를 늘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다 들어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아내가 하나씩 다시 넣으면 다 들어가고도 남는다. 가방에 들어가는 내용물은 동일하니 가방이 아니라 제대로 짐을 넣지 못한 잘못이었던 것이다. 더 큰 가방 또는 짐이 조금 더 효과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방을 사서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잘 챙기면 얼마든지 가방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짐이 어떻게 담겼었는지 기억하는 아내는 가방을 열어보기만 해도 남편에게 여행 중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여행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녀온 사람에게 얘기를 듣는 방법과 여행가방을 열어 짐작하는 방법이 있다. 여행 다녀온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자는 언어란 도구를 사용해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야 한다. 또 기억한 것 중에서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할 것이다. 사회로 이를 확대해 보면 일정기간 있었던 모든 여행의 기록을 그들의 기억과 언어로 정리해야 하는데 물론 가능하지만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며 또 어떤 방향으로 정리해야 제대로 된 여행의 기록이 될지 고민이 된다. 이때 가방의 기록을 생각할 수 있다. 구성원 모두의 여행 전후의 가방을 비교하는 사진들을 모아 보는 것이다. 말로 정리한 것 못지 않은 여행의 기록이다. 역사책 속에 한 왕조, 일정 시기가 몇 문장으로 정리되어 표현되고 이 또한 읽는 자의 의도대로 이해된다면 여행가방도 말과 글 못지 않은 어쩌면 언어보다 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기록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아내는 여행 전 싼 짐이 어떻게 어떤 순서로 사용되었는지, 사라진 짐과 추가된 짐 만으로도 여행 스토리를 떠 올릴 수 있다. 함께한 일상, 함께 간 여행의 경험으로 그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나의 출장을 펼쳐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의 역사를 정확하게 읽어낸다고 알려진 인공지능은 소통한 자들에게 그 순간을 다시 묻지 않는다. 오직 남겨진 언어란 데이터만 보면서 오간 대화의 언어들이 어떤 조건에서 발생했는지 살핀다. 이를 이전 발생한 상황의 조건에서 오간 언어들과 비교해 해석한다. 이벤트가 끝나면 남겨진 그릇 속 내용물 보다는 내용물이 담겼던 그릇의 흔적만 본다. 여행가방 처럼 인공지능도 흔적만 보는 것이다.


올 가을 감은 유난히 달다. 작년, 재작년 감보다 훨씬 맛있다. 단감은 시시콜콜 말하지 않지만 설사 올해 만들어낸 맛의 긴 스토리를 감이 들려준다고 해도 우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우린 결코 친절하게 상대방에 귀기울지 않는다. 그냥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길고 복잡한 스토리에 귀기울이지 못한다. 자신들이 하고픈 얘기만 내 뱉는 사회에서 말과 글 모두를 기억하고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타인이 중요하다고 하는 부분이 자신에게 와 닿지도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타인은 대개 관심없다. 김호중이 좋아 어쩔 줄 몰라 노래를 들려줘도 지코를 좋아하는 사람이 김호중 노래가 어떻게 좋겠는가? 순간이 지난 후 현장에 남아 역사로 기록되어 기억되는 것은 각자 좋아하는 것을 담았던 도구일 뿐이다. 언어와 돈이 대표적인 예인 기호란 도구 말이다.


삶이란 여행이 어떤 도구로 쓰여질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물론 택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인생이니 뭐라도 해야 후회가 없다. 누군가의 인생은 돈으로, 다른 누구는 부동산으로, 행동으로, 수집품으로, 친구로, 제자로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남은 자가 기록한다. 문화도 마찬가지인데 오직 역사만이 선택해서 기록한다. 기록된 모습은 얼핏 보면 종이가 끼여 모든 글자가 한꺼번에 찍힌 프린터 용지같다. 그래서 읽기 힘들지만 담길 것은 모두 담겼다. 읽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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