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장소 동시에 존재하는 자아

자아란 자신이 뿌린 기호의 성찰이다

by 강하단

**매거진 공통적용 “기호”의 정의**: 기호sign란 자신이 의미를 전달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도구인데, 아이콘, 인덱스, 상징으로 나뉜다. 특별한 설명없이 딱 보면 알수 있는 것이 아이콘 기호인데 나무가 여러개 그려져 있으면 숲이라고 아는 식이다. 주식 사이트의 화살표와 숫자는 인덱스 기호인데 주식상황을 화살표와 숫자만으로도 물리적 연결을 통해 알 수 있다. 상징기호는 약속한 내용을 설명듣고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언어가 대표적인 예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늦은 오후 소피아 미술관이 문 닫기 10분 전 급히 달려가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품 앞에 선다. 내일 다시 오겠지만 잠시라도 보고 싶다. 그렇게 파블로 피카소를 만난다. 피카소의 작품을 봤는데 마치 피카소를 만난듯 한다. 오래 전 과거로 돌아가 피카소를 직접 만난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감동적일까 느낄 정도로 나만의 피카소를 만난다.


나만의 피카소는 다른 사람의 피카소도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피카소는 한 명이었지만 세상 속 존재하는 피카소는 한둘이 아니다. 홍길동이 도술을 부려 여러 명의 홍길동이 있는 것 같다. 복사된 홍길동은 홍길동 분신이지만 여러 피카소는 피카소의 자아들이다. 분신과 자아는 한 존재가 여러 존재로 나뉘었다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홍길동 분신은 진짜 홍길동과 생각과 행동이 똑 같지만 피카소 자아는 피카소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홍길동 분신은 홍길동 자신이 중심인 반면 피카소 자아는 피카소가 아닌 타인이 중심이 된다. 자아란 만나는 사람이 해석한 대상인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피카소를 다르게 해석하니 피카소 자아는 한둘이 아니게 된다.


피카소를 만난 것이 아니라 게르니카란 작품을 통해서 피카소의 자아를 만난 것이었다. 이는 스페인 내전의 참혹함을 표현한 피카소 작품 속 여러 기호를 만난 것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피카소는 죽고 없지만 그가 남긴 그림 속 기호와 우린 여전히 소통하고 있다. 게르니카 작품 속 기호가 죽은 피카소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스페인 내전의 실상을 얘기해 주고 우린 그 기호를 통해 피카소만의 내러티브를 여전히 듣고 있다.


무소유 책의 저자 법정스님은 돌아가시기 직전 더 이상 본인의 책을 출간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 한동안 책은 출간되지 않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 스님은 그의 유언대로 책이 출간되지 않을 것이라 믿으셨던 것은 아닐 것이다. 유언의 형식을 빌어 책 한권 더 출간하고 스님의 자아를 하나 더 남기셨다.


이제 나 자신으로 돌아와 나의 자아가 어디에 있을까 자문한다. 내가 원하는 자아는 목소리를 아무리 높여 외쳐도 생기지 않는다. 기호가 타인에게 전달되고 기호 속 의미가 해석될 때만 자아가 생긴다. 기호는 몸짓, 표정, 행동, 사용하는 말과 글, 그림 속 점, 선과 색, 음악을 이루는 음, 그리고 구매해 소비하는 상품과 사는 집, 쓰는 돈이다. 이 모든 기호에 자신의 의미를 담는다. 자신의 자아는 그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쓰는 기호를 통해 타인이 해석해서 만든다.


어떤 사람은 피카소 처럼 무수하게 많은 다양한 자아를 가진다. 피카소의 자아는 장소와 시간을 초월한다. 하지만 어떤 다른 사람은 단 하나의 자아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수많은 기호를 사용했음에도 누구 하나 그의 기호를 해석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처럼 사후 자아가 다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이라면 성공했겠지만 왠지 그의 인생이 슬프다. 수십억 싯가의 한강뷰 아파트에 살면서 외제 전기차타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밥먹고 해외 여행 다니며 나름 친구 인맥도 두텁게 쌓은 사람이 죽은 후 타인에게 남은 자아라곤 딱하나 지갑에서 카드 꺼내는 모습이라면 어떨까. 결제카드 두 손가락에 끼워서 시원하게 결제하는 자아만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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