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는 물리학, 그림자노동 가치부여는 인간의 조건이다
예전 한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그림자노동에 대한 훈계 같은 설명을 카페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조선생은 그림자노동을 잘못 알고 계신것 같네요. 그림자 노동은 우리가 커피를 마신 후 커피 잔을 직접 선반으로 가져다 놓아 카페 노동을 줄여주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커피가격을 낮출 수 있는 효과가 생깁니다. 주부노동은 그런 효과와는 달라 그림자노동이 아니에요”.
이반일리히의 그림자노동 책을 언급하면서 편집자의 그림자노동 정의와 설명에 반박하지 않은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책의 출판을 의논하면서 을의 처지에서 갑인 출판사 편집인의 훈계를 거스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비겁하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림자노동에 대한 이해가 얕은 나 자신을 순간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이반일리히 책을 통해 그림자노동 지식을 받아들인 것일 뿐 경험, 생각과 고민이 담긴 그림자노동 의미를 갖지 못한 것이었다.
그 후 그림자노동은 가끔 떠오르는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같은 문제가 되어 버렸다. 주부노동은 그림자노동이라는 이반일리히의 정의를 여전히 동의하면서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중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 한쪽 귀로 흘려보내 왔었던 두 여성의 고민 속에서 그림자노동의 이해를 높이는 계기를 발견했다. 그림자노동으로서의 주부의 일이 여성 전유는 아니라는 말은 꼭 하고 싶다. 나의 경우, 두 명의 여성이 가르침을 준 것일 뿐이다. 어머니와 아내다. 두 여성은 “돈 한번 벌어봤으면” 하는 아쉬움을 평생 가지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가치로운 주부의 일과 노동을 온 마음을 다해 성실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지불되지 않음으로 인해 아쉬움을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평생 주부노동의 혜택을 누린 다른 가족은 적지않은 미안함과 심지어 때론 죄책감까지 갖게 되니 그것이 그림자노동이던 어떤 특정 이름의 노동이든간에 명예회복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여성 또는 남성에 의한 주부노동은 명예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임금을 못받을 뿐 가치롭다는 식의 위로 형식의 몇 마디로 면죄부가 주어져서는 안된다.
앞의 출판사 편집자가 설명한 커피를 마신후 커피잔을 선반으로 직접 반납하는 노동은 커피가격 할인 형태의 돈으로 계상된 것이다. 즉, 그림자가 아니라 화폐경제의 빛 속에 이미 편입되어 있는 노동이다. 편집자의 엄청난 착각이다. 주부노동은 다르다. 그림자를 제공함으로써 임금을 지급받아 어깨 힘주는 수많은 사회 속 빛의 노동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 어떤 임금도 지불받지 못했다. 임금노동이 소중한 만큼 그림자노동은 사회적 빚에 해당된다. 그림자노동이란 이름은 사회가 지불부도를 저지른 어음인 셈이다.
빛이 있어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 물리학의 본질이라면, 그림자노동이 있기에 빛의 노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상 인간의 조건이다.
그림자노동에 명예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댓가를 정당하게 정의롭게 지불할 수 있는 어떤 아이디어도 아직 나에겐 없다. 하지만 그림자노동의 가치를 말로 때우든지 상속과 이혼과 연관된 법적 보상으로 해결하려는 것만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림자노동에 기본소득, 기본자산 등의 아이디어를 적용하는 것은 자칫 더한 분쟁을 일으킬 소지도 있고 이런 종류의 기존의 돈 중심 프레임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인간의 노동과 일의 본질을 다시 한번 따져보고 임금이란 돈의 성격을 다시 질문하는 첫 출발점으로 돌아가자. 팬데믹이 가져다 준 원격근무와 재택근무가 가능해진 상황, 그리고, 블록체인이 가져다 줄 토큰 경제의 찻잔 속 폭풍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그 어떤 다른 것보다 그림자노동에 대한 사회적 거리 좁히기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