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씌우는 개념이란 무덤
“난 나이드는게 좋아요. 왜냐하면 언어로 생각하는 족쇄 같은 것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느낌이 들거든요”. 23살에 만났다가 9년 후 32살이 되어 다시 만나 제시가 셀린느에게 말한다. 비포선셋(2004)이란 영화의 카페 안 대화장면이다. 32살의 여전히 젊은 청년들이 아직은 이해하기 힘든 말인데 하다가도 20대를 막 보낸 30대 초반의 청년이기에 가능한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이 들어 성숙해 진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싶다. 성숙은 숙성이라는 노래 가사, 드라마 대사에 공감되는 순간이다. 언어의 족쇄같은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이든 인간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실상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언어로 생각해야 하는 인간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언어가 가져다 주는 개념이 아니면 생각하기 오히려 힘들어 진다. 언어없이는 생각할 수 없지만 개념없는 생각은 얼마든지 가능한대도 불구하고 개념없이는 논리적인 생각을 힘들어 한다. 심지어 생각은 하는 것인가 의아해 지기까지 한다.
개념이 프레임이 되어 짜여진 틀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본다. 기후재앙 위기를 극복하는 행동하면 탄소감축이란 개념에 국한되기 일쑤다. 심지어 가장 진보된 생각을 해야하는 환경주의 실천가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후위기 극복 노력은 탄소감축으로 공식화 시키는 경우가 많다. 각종 국제기구와 정부 정책 없이는 환경주의는 없다는 것인지 가슴 답답해 진다. 복잡하게 얽힌 지구생태와 기후를 연결하는 다양한 고민 보다는 대중교통, 플라스틱, 에너지 절약과 같은 행동지침과 정부를 향한 비판에 집중하기 일쑤다. 환경주의 실천가도 이를진대 정치인, 국제기구, 정부의 기후재앙 극복 정책은 잘 짜여진 틀로 무장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탄소감축 숫자 목표만 달성된다면 어떤 전략적 행동이라도 할 기세다. 기후위기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모여서는 정작 기후위기 얘기보다는 그 실천을 위해 만든 개념과 개념이 변한 틀로만 말 잔치, 개념 잔치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경험이 많다는 것이며 경험은 많은 개념들을 만나게 해준다. 많은 만남의 순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개념을 만나 세계를 이해하고 행동한 이후에는 개념없는 세상으로 돌아가 지혜로워 지는 것이 첫번째 길이라면, 개념을 익힌 후에도 그 세계에 남아 세계를 살아갈 지식으로 삼는 선택이 두번째 길이다. 두번째 길을 선택하면 개념의 지식이 쌓이니 유식해진다. 유식해 지면 부작용도 있다. 아는 것이 많아지니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잘 보이질 않는다. 지식이 가져다준 사각형 틀로만 세계를 바라보니 틀을 살짝만 벗어난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틀 속에서 논쟁하고 싸우는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고 통하는 말이 그럴싸 하게 지식으로 포장된다. 많은 경우, 틀 속 지식은 화려하다. 촛불을 보도한 한 유명한 앵커가 2023년 신년 특집에 나와 기후위기를 다루면서 사용한 틀은 5년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의 화려한 틀은 이제 녹물 흐르는 틀이 되어 있었다. 예능이라 다른 분야이기는 하지만 20년 가까이 그 어떤 틀도 만들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상황에 멋지게 대처하는 “유재석”의 유연한 지식과는 대비된다.
이 시대, 오죽하면 꼰대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지식 꼰대, 개념 꼰대는 꼰대 중 최고의 꼰대라고 할 수 있다. 들어보면 그럴 듯한 온갖 이데올로기 개념 용어들, 지금 시대 상황을 담지 못하는 과거 지식 굴레들로 나름 분석하고 심지어 해석해 낸다. 유투브 “지식 꼰대” 방송에서 배운 온갖 용어들로 중무장한다. 말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다. 지식 괴물, 개념 괴물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입 안 어디엔가 녹물을 뿜어져 나오게 하는 모터펌프라도 장착된듯 하다.
망치로 그 모터펌프를 때려 부셔야 한다. 온갖 궂어진 프레임 개념을 걸러내어 말하게 해주는 냄새나는 마스크도 잘라 버려야한다. 녹물 펌프, 때낀 개념 마스크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머리를 비우고 가슴으로 느껴야 새로운 개념으로 다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포선셋”의 제시가 말한 나이듬의 정의이다. 나이들어 기분좋아지고 행복해지며 지혜로와 지는 것이다. 고인물을 걷어낸 이후 다시 쏫아나오는 샘물같은 신선한 지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비결이다.
나이들어 죽음으로 가는 여정은 인간으로 태어나 주어진 족쇄와도 같은 언어란 무덤에서 해방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기후재앙을 보고 탄소감축이 머리에 자동으로 떠 올랐다면 “아차” 해야 한다. 사회를 염려하는 정치하면 좌파, 우파의 단어가 기계처럼 떠 올랐다면 역시 “이런” 하고 가슴이 내려 앉아야 한다. 탄소감축 틀 없이 기후위기를 고민하고 좌파, 우파 이데올로기 내려 놓고 정치를 고민할 때만이 탄소를 제대로 감축하고 제대로 된 이데올로기를 비로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이를 이룰 수 있을까? 해결할 길 중 하나가 디지털 시대 행동주의라고 어제 얘기했었다. 실천은, 우리 자신을 믿는 대신 행동의 조건을 믿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인정했으면 한다. 인간성 회복의 유일한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