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칸딘스키 추상화 비교
추상(抽象)만이 세계 모든 만물의 진정한 레알이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 으뜸은 추상하는 것이다. 관찰하고 이미지를 뽑아 이를 표현까지 해서 완성하는 과정 말이다. 다른 동물도 관찰도 하고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릴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를 뽑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능력이다. 인간의 세상은 오직 추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올해 아부다비에 갈 기회가 있었다. 아부다비 뉴욕대학 캠퍼스 초청 일정 마지막날 오후 늦은 귀국 비행기 덕분에 아부다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이때 아부다비에 “루브르 아부다비” 미술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리 루브르를 간지 워낙 오래되어 잘 기억나진 않지만 “형님만한 아우없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형님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누벨 건축가가 디자인한 건축과 빛을 주제로 한 돔은 굳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충분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나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은 전시장 한 구석에서 만난 두명의 화가였다. 피카소와 칸딘스키는 90도로 교차하는 벽의 좌우에서 만나고 있었다.
예술을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피카소와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면 “아! 추상화구나”하고 구별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추상화는 독특하다. 기이한 반면 매력 있다. 피카소의 추상화를 보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겠지만 대부분은 멋지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놀라와 한다.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게르니카란 작품 앞에 서면 왠지 숙연해 지고 추상화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감동적일까하는 느낌이 든다. 오직 추상이기에 가능한 경지인 셈이다. 반면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처음엔 생경하다. 피카소 추상화에 비해 덜 직감적이다. 가끔 알것 같은 이미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를 갖고 저런 모양들을 독특한 색깔로 표현했을까 알기 쉽지 않다. 그도 그럴것이 칸딘스키 추상화에는 코드가 있다. 즉, 코드를 알지 못하면 칸딘스키 추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다. 사각형은 사람의 이성, 원은 자연의 순환, 삼각형은 예리한 젊은 이성, 둔각은 나이든 원숙, 녹색은 사라지는 생명의 슬픔, 붉은 색은 생명의 탄생과 성장, 푸른색은 우울 등의 코드를 칸딘스키는 가지고 있다. 이런 코드를 안 후에 칸딘스키 추상화 작품을 보면 풍경이 보였다가는 금방 한 인간의 삶이 보이고 때로는 한편의 음악 연주를 듣는듯 하다. 피카소와 칸딘스키는 추상화라는 범주 속에서 이렇게 다른 작품세계를 얘기해 주고 있었다. 세계를 관찰하고 마음이란 장치로 뽑아낸 추상이 피카소 작품이라면, 관찰 후 자신이 약속한 추상방법론 코드로 뽑아 표현한 추상은 칸딘스키 작품이다.
직각으로 만나는 벽면에서 각기 다른 추상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듯 얘기해 주는 두 거장의 작품을 왼쪽과 오른쪽에 두는 호사를 “루브르 아부다비”에서 누릴 수 있다. 사막 위에 세운 아부다비 도시가 바로 추상이라고 그들의 루브르에서 애써 다르게 말하고 있는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