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영화화했다
예고없이 순식간에, 어떻게 해 볼 도리없이 발생하는 엄청난 재해, 재난 앞에서 인간은 나약하기에 지진 또는 전쟁은 희생자란 이름의 사망자, 생존자, 유족,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남긴다. 살아남은 희생자도 당연히 삶을 이어간다. 그들도 누구나 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다. 다만 행복의 정의가 다를 뿐이다. 또한 이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재난의 징후를 보는 능력 말이다. 엄청난 자연재해가 발생할 수 있는 징후, 전쟁의 징후, 무분별한 인간 문명과 과학기술이 가져올 재난 징후를 예감하고 가능성의 떨림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긴다. 바람, 비, 햇빛을 느끼듯 재난을 예측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다. 너무나 아픈 능력이다. 그들은 그래서 선지자이고, 그들은 성자이다.
희생자는 보이는 것을 말한다. 주위 사람들은 희생자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기에 그들이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오해한다. 충분히 애도받지 못한 마음의 상처로 남루한 모습 그대로 세계를 향해 희생자는 보고 듣고 느끼는 그대로 말해 더 아프고 슬퍼 보인다. 보상을 원하는 행동이라고 오해 받는 것 쯤은 상관없다. 두번째 희생을 감수하며 세상을 향해 보이고 들리는 재난의 징후를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이 두렵기 보단 재해로 생길 수 있는 이웃의 고통이 더 아프기에 잊혀짐, 오해, 무시, 심지어 멸시 당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기에 굴하지 않는다. 그들이 재해로 겪은 아픔을 남들은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두번재 희생에 그다지 아파하지도 않는다. 선지자의 고행을 감뇌하고 성자의 길을 걷는다. 하늘 아래 세상에 신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살면서 재난의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희생자가 보는 세상은 천재 수학자 로렌츠의 좌표 변환 정도로는 볼 수 없다. 특수상대성 이론으로도 힘들다. 과학으로 이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일반상대성이론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재난의 징후를 찾아 온 세계를 다녀 찾은 모습은 12년 전 그 곳, 그 시간이었다. 재난은 시공간 따위로 설명할 수 없으며 과학기술 데이터로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하지만 눈을 돌려 시간과 공간이란 굴레, 중력이라 믿는 모든 과학기술, 인간 지식이란 이름의 진실을 덮는 가림막을 걷어내면 누구에게나 보이는 세상이다. 그래서 최소한 일반상대성이론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것은 천재 물리학자의 난해한 이론이라기 보단 인간의 위대함의 다른 표현이다. 모든 굴레와 욕망을 벗어난 신의 능력과 사랑이 내려 앉은 희생자의 삶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실천한 모습이다.
희생자가 보상을 바라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우리는 신을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일반상대성이론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그럼 희생자는 누가 위로하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2023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말하고 있었다. 시공간이 사라진 일반상대성이론의 세상에서 다시 만난 자신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재난의 징후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과학도, 기술도, 정부도, 그 어떤 장비도 아닌 바로 그 순간 바로 옆에서 만난 사람과의 관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도 두 점간의 관계야 말로 세상의 이치라고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이를 “스즈메의 문단속”은 말했다. 난 이보다 더 정확하고 멋진 일반상대성이론 미분방정식의 답을 지금껏 만나지 못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과 함께 들려오는 “카나타 하루카”란 OST 노래 첫 구절 가사에 상대성이론이 들려왔다.
12년 전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 사망자의 명복을 빌고 모든 희생자 분들께 마음과 몸을 다해 애도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