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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단 Mar 24. 2023

[사랑과 영혼] 순수는 깨끗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언어로 표현하는 사랑과 영혼

순수함은 비어있다. 아무런 모습과 흔적이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순수함에는 다른 사람과는 차이를 갖는 원형의 잠재력은 있다. 원래 그런 것이라 원형(archetype)이고 그 이름을 영혼이라 부른다. 그러니 세상 모든 영혼은 각기 다르다. 영혼의 잠재력은 상황을 만났을 때만 그 순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존재한 이후에는 다시 영혼의 원형으로, 순수로 돌아간다. 우리가 선악, 도덕,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잠시 머물렀던 존재일뿐 영혼 자체는 아니다. 그러니 순수는 착하고 깨끗한지 판단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순수함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혼이 착하다고 말할 순 없다. 영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잠시 머물렀던 흔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흔적이 착하면 그 원형도 착하지 않겠냐는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영혼의 원형은 바로 다음 순간 화내는 존재로, 악한 존재로도 될 수 있으니 영혼의 원형을 직접 판단할 수는 없다.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원형인데 어떻게 논리적으로 표현가능한 존재로 언급될 수 있겠는가.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직접 만나지는 못한다. 영혼이 존재한 순간이 다른 영혼의 순간과 만나는 것이다. 그 존재들은 감각하여 몸과 기억을 갖는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시점이다. 언어로 생각하고 이해하며 지식도 만든다. 기억 그리고 언어로 이루어진 지식이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영혼은 텅빈 원형이다. 다만 영혼이 존재하는 순간에는 영향을 미친다. 즉, 논리가 영혼의 존재를 지배한다. 이런 지배를 벗어나려면 존재한 순간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언어로는 되지 않고 오직 감각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영혼의 원형과 존재를 연결해 줄 수 있는 것은 감각 뿐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영혼과 사람, 언어 이전과 이후의 경계이다.


지금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들까지 모두 말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런 글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이해될지, 또는 감각으로 연결될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언어는 감각과는 무관한듯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언어로 생각하고 이해한다고 했으니 상황을 감각할 때 무관하기 어렵다. 감각이 감정을 만들 때 언어로 이루어진 기억과 지식이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경험과 합쳐져 정서도 생긴다. 텅빈 순수가 감각으로 연결되고 감각은 언어로 연결되는 경계가 있지만 경계는 불연속이 아니다. 순수의 텅빈 공간이 감각하는 물질로 채워질 때도 연속되고 언어없는 감각이 언어로 표현될 때도 연속된다. 연속되는 공간을 채우는 물질을 알지 못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은 두 사람 영혼의 원형이 존재하는 순간이다. 타인과의 만남이다. 비슷하게 자신의 순간을 그 자신의 다른 순간이 만나기도 한다. 자신과의 만남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영혼의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껴질 수 있다. 다만 사랑하는 대상이 영혼일 수는 없다. 영혼은 텅빈 원형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니 영혼의 원형이 존재하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한 영혼의 존재한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한 순간은 때론 받아들이기 힘든 추함과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 그 모든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니, 사랑이 어찌 위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은 언어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고 저 너머에 있어 감각할 수 없는 세상을 느낄 뿐이다. 세계와 초월된 자신 영혼의 원형을 언어의 도움을 받아 감각으로 느낄 뿐이다. 사랑과 영혼을 이렇게 라도 무리하게 표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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